아바나에 거주하였던 한인 22명은 1937년 1월 17일에 안순필의 사택에 모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아바나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초대 집행위원장은 이인상이었고, 서병학과 문무봉을 각각 서기와 총무로 뽑았다.
대한인국민회는 설립 이후 별도의 건물을 갖지 못한 채 이종헌과 안순필의 집에 모여 모임을 열었다. 이종헌은 처음에 목공일을 하였지만 점차 성장하여 가구공장을 운영하였는데, 1938년1939년과 1941년1945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자연히 코코솔로(Cocosolo) 지역 12812 에스페란사(Esperanza)에 자리한 그의 집은 대한인국민회 국민회관으로 이용되었다. 안순필은 예수스 마리아(Jesus Maria) 109가(街)에 살았는데, 1937년에 이곳에 한인 2세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서 흥민학교(興民學校)를 설립하여, 이듬해 교장을 맡기도 하였으므로, 이 집도 대한인국민회 국민회관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밖에 솔(Sol)가 409번지에 위치한 다른 한인의 집도 대한인국민회의 국민회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가 독자적인 건물을 갖지 못한 채 경제력을 갖춘 일부 한인의 집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아바나의 한인 사회가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곧 해방 이전에 아바나 지역에는 60명 안팎의 한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이 가운데 경제 활동이 가능한 성인 남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또한 당시 쿠바의 노동 조건은 외국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한인들이 주로 일용 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늘 생계를 걱정해야 할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국민회관은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가 소유한 건물은 아니지만, 아바나 지역에 거주하였던 한인의 자치 활동은 물론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이용된 중요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