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호(雅號)는 초개(草芥), 서울 필운동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했다. 1959년 『사상계』에 시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둔다」가 추천되어 등단했다.
김영태는 음악 평론을 시작으로 평론의 길에 들어섰으며 자유극장 동인 시기부터 1966년까지 10여 년간 연극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중학생 시절 외국 서적 판매점에서 발레 사진집에서 본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기억이 그를 무용으로 이끌었다. 이후 발레리나 스베들라나 밸리 오소바의 책과 안나 파블로바의 사진집 등 100여 권의 발레 사진집을 소장하게 된 그는 1969년부터 무용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유의 감성을 담은 시적인 문체로 그는 인상주의적 시적 비평가로 불렸다. 그는 “무용은 인체의 시입니다. 그만큼 압축적이고 상징적이죠.”라는 말을 남겼다.
한편 김영태의 시는 안무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조승미의 「꽹과리와 아라베스크」(1983), 황인숙의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1989), 윤덕경의 「매혹」(1990), 박명숙의 「결혼식과 장례식」(1990), 박인자의 「가을저녁의 시」(1992) 등 30여 편의 작품이 그의 시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고(故) 김수영(金洙映) 시인을 기리는 시 「멀리 있는 무덤」(1978)은 문일지(1981)와 고(故) 한상근(2005)의 무용 작품으로 남아 있다.
김영태의 무용 평론은 『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1985)을 시작으로, 『저녁의 코펠리아』(1988), 『눈의 나라 사탕비누들』(1993),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있다』(2002), 『살아 있는 춤 눈으로 쓴 시』(2004) 등 열세 권의 평론집에 담겼다. 그 밖에 열권의 인물 소묘집, 열두 권의 산문집, 두 권의 음악평론집을 출간하였다.
‘전방위 예술인’으로도 불렸던 그는 독특한 필체로도 유명했다. 일명 ‘봉두난발체’로 불렸는데 그 필체로 자신의 저서의 표지 또는 다수 무용인 작품의 팜플렛을 장식했다. 2005년에는 평생 모은 무용 자료 2만여 점을 아르코예술정보관에 기증했고, 암 투병 중에도 공연장을 지켰다. 오랫동안 춤 공연을 보았던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은 언제나 극장 측에서 비워든 김영태의 지정석이었다. 그가 남긴 무용평론집을 통해 무용과 함께한 그의 30여 세월이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현대문학상(1972), 시인협회상(1982), 서울신문사 제정 예술평론상(1999), 허행초상(2004)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그를 기려 ‘김영태무용가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