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슬 ()

무용
인물
해방 이후 『춤동작』을 저술한 무용가. 한국무용가.
이칭
이칭
김길남(金吉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22년
사망 연도
1983년 2월
출생지
경기도 여주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춤동작』을 저술한 무용가. 한국무용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22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김길남(金吉男), 박금슬(朴琴瑟)은 예명이다. 일본여자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39~1943년에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연구소에서 현대무용을 배웠다. 귀국 후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수원의 법릉사에 기거하던 곽서순 스님과 혼인하였다. 8·15해방 이후 강원도 백담사 오세암의 천월(千月) 스님에게 범패를 배우고 서울로 돌아와 1946년 와룡동에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가게 되고 정형인에게 춤을 배우면서 박금슬은 그의 제자인 정소산과 자연스레 교류하게 되었다. 정소산의 입춤과 굿거리춤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갔는데 이러한 과정이 그의 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불교무용의 명인인 권수근 스님으로부터 나비춤과 바라춤, 법고춤 등을 배웠다.

서울에 돌아온 뒤 안암동, 용두동, 종암동 등지에서 무용연구소를 열었고, 1951년 부산문화극장을 시작으로, 1954년 서울 시공관에서 신작 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58년 대구국립극장 무용 발표회를 했고, 1959년과 1960년에는 원각사에서 신작 발표회를 여는 등 계속적인 공연 활동을 펼쳤다.

박금슬은 1969년 동남아시아 순회공연이 끝난 뒤 흥행사의 잘못으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태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하지만 태국에 머무르면서 태국 국립예술학교 무용학과에서 주최한 강습회에 6개월간 참가했고, 1974년에는 유엔 여성단체(UN Womens Group)가 주최하는 아시아 민속축제에 참가했으며, 1975년 국제민속춤경연대회에서는 부채춤으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7년 건강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고 몸이 회복되자, 청주사범대학 무용교육과와 용인민속촌 등에서 다시 후학을 가르쳤다.

한편 이시이 바쿠로부터 현대무용을 배우면서 한국무용의 체계화를 절실히 느낀 박금슬은 자신의 한국춤 동작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30여 년간의 연구와 노력 끝에 1982년 『춤동작』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그 책에는 ‘원자세’를 비롯해서 상체 동작, 하체 동작, 전체 동작의 명칭과 내용을 정리하고 굿거리춤, 입춤, 살풀이춤의 춤동작을 기록하였다. 이른바 ‘박금슬 기본’, 즉 박금슬이 만든 한국춤 기본 동작과 용어들은 지금도 한국무용인들의 무용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다.

박금슬의 제자는 한보성, 정인삼, 김광숙, 박태조, 국수호, 김은희, 서희주, 김평호 20여 명에 이른다. 주요 작품으로 「번뇌」, 「승무와 바라」, 「꺼구로 산조」, 「태초」, 「환희」 등 50여 편이 있으며 불교적 색채를 띤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참고문헌

『춤동작』(박금슬, 일지사, 1982)
『춤사위』(정병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1)
집필자
이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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