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했다. 이병삼은1920년대에해삼위 학생음악단의 박시몬, 해삼위 동포연예단의 김동한과 더불어 해삼위에서 온 이른바 무도 3인방으로 알려져 있었다. 1923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약 8개월간 일본 동경 청년회관에서 체육무도를 배운 후 평양숭실중학교에서 체조와 무도를 가르쳤다. 1925년 6월부터 8월까지 중국 하얼빈 무도전문학교에서 연수한 뒤 귀국하여 1924년 9월 평양에 사립무용기관인 구미무도학관(歐美舞蹈學館)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11~30세의 수강생들에게 체육무도, 무대무도, 야외무도 등을 3개월 과정으로 가르쳤다.
1925년 9월 경성 낙원동에도 같은 이름의 무도학관을 열었으며 민악무, 체육무, 사교무, 무대무를 가르쳤다. 민악무는 우크라이나 민속춤인 호팍 댄스(hopak dance)로, 코팍 춤이라고도 한다. 체육무는 율동·유희·체조로 추정된다. 이 무도학관은 한국 교육무용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해외파 출신이라는 이점에 기반해 언론 보도와 광고 등 신문지면을 통해 그의 무도 열풍을 선전했다. 하지만당시 무도 열풍이 풍속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목사들과 청년들이 충돌하면서, 1926년 3월 사교무용을 금지하는 사교무용취체법(社交舞踊取締法)이 중의원에 제출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이후 그의 대외적 활동은 확인되지 않지만 민악무, 사교무 등을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