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경기도 경성부(서울)에서 품팔이꾼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학비난으로 중퇴한 후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했다.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1930년이며, 「수일과 순애」를 시작으로 극예술연구회가 개설한 제1회 하기 극예술 강습회에 박제행과 함께 연극수업을 받았다. 1932년 박제행과 태양극장에 입단하여 동양극장으로 옮길 때까지 활동하다가 1935년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전속극단 청춘좌의 창단멤버로 참여했다. 「검사와 사형수」에서 사형수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상당히 참신하다’는 연기평을 받았다.
이후 1937년 중앙무대가 창립되자 뒤늦게 참여했으며, 1939년 2월 영화 「복지만리」에 출연했고, 출연자들과 극단 고협을 창립했다.「복지만리」는 만주개척을 소재로 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 영화다. 만주를 하나의 이상향으로 미화했고, 조선영화의 만주진출을 알린 첫 작품이다. 1940년 3월 ‘춘향전 전람회’를 개최하는데, 1주일간 20만 명의 관람객이 동원되었다. 같은 해 5월부터 고협은 일제의 전시체제에 부응하는 일련의 공연활동을 시작했다. 일본군 위문차 만주 순회 공연도 가졌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 조선연극동맹이 주관하는 3·1기념 연극대회에 출연하던 중, 권총을 가진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여 하복부가 관통되는 사건을 겪었다.
북한에서는 첫 예술영화인 「내고향」에서 유격대 공작원 김학준 역,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에서 여성 포수의 남편 역, 「정찰병」에서 미군 사단장 역,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에서 왕호 역, 「두만강」에서 지주 역, 「다시 찾은 이름」에서 지주 역 등을 맡아 고평을 받았다. 또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북한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1971년 지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