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선(朴宗善)은 1912년 2월 19일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소작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홍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4살에 남포, 원산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원산에서 악기를 만드는 공장인 고도상회에서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악기들의 함통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종류별로 나무를 가공하거나 기구 사용하는 방법을 습득하였다. 20세가 되는 1932년부터는 서울 문명상점이나 개성 미술상회 등에 취업하여 불교의식용 제단이나 공예 모조품 등을 제작하였다. 1939년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여 순천에 내려가 5년간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목재노동조합 평안남도 지부장, 목재노동자산별중앙위원회 문화부장, 조선미술가동맹 공예가로 있으면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공예품들을 제작하였다. 1956년부터 30여 년간 평양미술대학에서 공예강좌장, 공예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면서 후배들을 양성하였고, 1980년에 부교수직에 올랐다. 1985년 2월 13일에 사망했다.
박종선은 1947년 8.15 해방경축 전국예술축전 미술전람회에 「군학병풍」을 출품하여 3등상을 받았다. 조대일의 『조선미술사』에서는 이 작품이 “과거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나무공예의 섬세한 수법을 계승하여 해방된 새로운 시대적 미감에 맞게 구성하고 정교하게 처리된 우수한 작품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948년에 높이 20㎝의 「편지함」을 제작하면서 백두산 만병초와 진달래를 부조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의걸이, 이불장, 책장, 경대, 탁자, 문갑, 평상 등 16점의 목가구 작품을 사용 목적에 맞게 세분화하여 제작하였다. 6.25 전쟁기에 제작한 「테블」(1951년)과 「의자」(1951년)는 전승사적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갑」(1953년), 「사방탁자」(1953년), 「모랭이」(1955년), 「필갑」(1955년) 등 전통적인 목공예품에 혁명적인 내용을 반영하여 각종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56년부터 30여 년간 평양미술대학 공예강좌장,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공예강좌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으며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과자기」(1960년), 「소반」(1961년), 「거울함」(1963년), 「참외형과실반」(1965년) 등 우수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중 「소탁자」, 「15각테블」, 「옷걸이」, 「화류장」, 「사방탁자」, 「주안상」, 「거울함」, 「문갑」, 「이불장」, 「책장」 등은 사적물로 지정되어 혁명박물관과 사적관들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창작경험에 기초한 이론 서적을 출간하였는데, 『공예총론』(1960년), 『공예기법』(1971년), 『공예기초』(1971년), 『공예재료-돌공예편』(1979년), 『공예재료』(1983년) 등이 있다.
1976년에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