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협

공예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평양공예제작소 연구실장을 역임한 공예가. 옻칠공예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2년 4월 6일
사망 연도
1969년 5월 8일
출생지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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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평양공예제작소 연구실장을 역임한 공예가. 옻칠공예가.
생애

최시협은 1922년 4월 6일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에 천연사립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하였다. 1936년 14살에 삼척동에 위치한 고려미술나전칠기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하면서 나전칠기 기술을 습득하였다. 1943년 강원도 철원에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 이후 철원군 어운면 양지리 인민위원회 서기장과 위원장으로 있었다. 6.25 전쟁 시기에는 평양의 종합목장과 사무용품공장에서 옻칠공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평양공예제작소 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옻칠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1969년 5월 8일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954년부터 10여 년간 평양공예제작소 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면서 나전칠기나 옻칠제품을 제작하였다. 1955년 「메달함」, 6명이 합작하여 만든 「대화병」, 1957년 「포도무늬서류함」과 「무궁화문서류함」, 정성조 등 4명이 합작하여 만든 「나전병풍」, 1959년 「과자기」, 1961년 「꽃다반」 등이 있다. 그 중 「메달함」은 국가에서 필요한 제품을 제작한 것으로 그 해 국가미술전람회에서 3등으로 입상하였고, 「포도무늬서류함」은 나전칠기의 전통을 현대화하여 소품전에서 2등상을 받았다.

옻칠의 기술과 형상을 현대적 미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기물의 형태와 무늬에 변형을 주기 시작하였다. 「대화병」은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어깨가 듬직하고 아래로 내려오며 매끈한 곡선을 보이는 매병 형태를 취하되, 금강산 삼선암의 풍경을 자개로 새기고 검은 옻칠로 마감한 나전칠기 작품이다. 「나전병풍」의 경우에도 나전자개를 이용하여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제작하였다.

「과자기」나 「꽃다반」 등은 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고자 나전자개를 바르고 옻칠한 기물의 표면을 유리처럼 마연하여 완성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상훈과 추모

최시협은 나전옻칠공예를 계승 발전시키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한 공을 인정받아 김일성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이재현, 조선백과사전출판사, 1999)
『조선미술사』3(조대일, 조선과학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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