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출생했다. 호는 종산(種山)이다. 1920년 일본 센다이의 제이고등학교 제1부 독법문학과를 2학년 중퇴,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경제과를 졸업, 1926년 콜롬비아대학 대학원 경제과를 졸업했다.
1921년 6월 동아일보 여수지국 기자, 1927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조사부장, 경제부장, 정치부장 등을 역임했다. 1933년 8월 동아일보를 퇴사한 뒤 만주로 건너가 신징에서 창간된 『만몽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3월 만주국 재정부 촉탁에 임명, 다음 해 11월 사무관으로 승진해 세무사 업무를 담당했다. 이 때 전국적인 친일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조선인민회 분회 상임감사를 지냈다. 1937년 이사관으로 승진해 경제부 대신관방으로 전임되어 자료과장으로 근무했으며, 독직 혐의로 4개월간 구속 수감되었으나, 불기소 처리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참여해 외자청의 초대 구매처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장면(단장), 김활란,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김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 참석했다.
이후 여천군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해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자 부흥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67년 3월 26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