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순천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자는 인언(仁彦)이다. 박항래의 생몰 시기에 대해서는 태어난 해는 1861년 또는 1871년, 생일은 6월 28일 또는 11월 6일, 사망일은 1919년 12월 24일 또는 11월 3일로 차이가 있다.
박항래는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조국 광복을 위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파리강화회의의 내용과 서울에서 거사된 독립선언식 및 독립만세시위에 대하여 전해 듣고, 순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순천 지역에는 3월 2일, 천주교 남원교구로부터 전달받은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작성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순천읍 배포를 담당한 강영무(姜塋武)는 선언의 취지를 대중에게 널리 알려 만세시위를 유인할 의도로 2일 밤 비밀리에 군청, 면사무소, 헌병 분견소 앞 게시판과 성문에 독립선언서를 게시하였지만, 이 같은 활동이 바로 시위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7일 오후 1시경, 마침 순천읍 장날이어서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박항래는 백지 1장을 사 가지고 남문 다리에 있었던 연자루(燕子樓)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정당성을 연설한 뒤, 백지를 흔들며 수 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현재 경향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순천에서도 만세를 외치자.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다.
그 광경과 만세 소리에 수백 명의 군중들이 성문 아래로 몰려들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만세 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에 일본 헌병이 박항래를 체포하자, 그는 의연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연행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항래의 단독 거사는 당시 남문에 모여 있었던 군중들을 동참시키지는 못하였지만, 4월 9일의 벌교 아랫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4월 13일에는 낙안읍내에서 약 150명 규모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쳤고, 4월 14일에는 다시 벌교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는 박항래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2011년 8월 당시 연자루 위치였던 남문 다리 옆에 박항래의 흉상(胸像)을 설치하였다. 박 의사의 후손들은 1974년 죽도봉공원(竹島峰公園)에 그의 행적을 기린 기적비(紀跡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