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엽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 장날에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다. 군북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이 합세해 출동한 일본군과 대치하고 투석전을 벌이면서 주재소를 파괴하던 중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가 이어졌다.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박상엽은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1855년 6월 30일 태어났다.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군북 장터에서 순국하였다.
박상엽은 남달리 애국심이 강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각오를 굳건히 하였다. 망국민의 쓰라린 설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3 · 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에 번지자 동지들과 결의하여 군북 장날인 3월 20일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조상규(趙相奎), 조용효(趙鏞孝), 이재형(李在衡), 조정래(趙正來), 조성규(趙聖奎), 조경식(趙璟植), 조형규(趙炯奎) 등과 함께 군북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0일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의 제1단계는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박상엽(朴尙燁)은 시위 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제2단계는 오후 1시경, 조상규가 둑 위에 올라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용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000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신창 · 소포 · 안도를 행진했는데, 도중에 장터 상인들과 밭매던 농부와 아낙네까지 차례로 합류해서 5,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 대열을 해산시켰다.
제3단계는 오후 5시경, 5,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 대열에 조준 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박상엽도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만세의거에서 사망자는 남자 21명, 여자 1명, 부상자는 남자 17명, 여자 1명이었으며 일본 측은 1명 사망, 부상 군경 12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나 사상자 면에서 다른 지역의 만세의거를 압도하였다. 함안 사람들은 일제의 총칼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저항하였던 그날의 만세의거 재현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