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용천리 출신으로, 1900년 4월 14일에 태어났다. 1920년 3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박수찬은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재학하던 중, 3월 6일 동급생인 박노영(朴老英) 및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 공업전수소 2학년인 김세룡(金世龍) 등과 함께 독립 취지를 고양하는 격문을 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동포여 일어서라'는 격문의 원고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3 · 1학생만세시위의 주모자인 한위건(韓偉健)이 작성하였고, 박노영 · 방재룡(方在龍)과 함께 관훈동 김세룡의 집에서 유석우(庾錫祐)로부터 빌린 등사판으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명의로 된 격문 800여 매를 인쇄하였다.
그 내용은 민족대표 33인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원칙에 따라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으로, 3월 8일 관훈동 일대에 250여 매를 배포하고, 소격동 신용식(申傭植)의 집에서 방재룡이 주선한 사람에게 250여 매를 전해주어 배포케 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힘쓰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20년 3월 8일 옥사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