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안주군 안주면(安州面) 출신이다. 1886년 7월 2일 태어나서 1921년 10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박의송은 1919년 2월 말부터 평안남도 안주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안주에서는 김화식(金化湜)의 아버지 김찬성(金燦星) 목사가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김 목사가 서울로부터 독립만세시위 계획과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후, 독립만세시위 계획이 수립되었다.
박의송은 전성걸(全聖杰), 김병건(金炳乾), 김병제(金炳濟), 김영원(金榮元), 김화식, 이인택(李仁宅), 전예순(全禮淳), 김희주(金禧柱) 등과 함께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면서 안주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박의송은 군수 김희선(金羲善)을 설득해 3 · 1운동의 협조 승낙을 받았다. 박의송은 이웃 마을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는 한편, 서울에도 사람을 보내 일의 추세를 입수하였다. 또한, 군수 김희선으로부터 원조 받은 종이와 물감으로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태극기를 그렸다. 그렇게 그려 받은 태극기는 박의송의 집 천장 속에 숨겼다. 그러나 비밀이 누설되어 무장한 헌병들이 박의송을 집을 급습해 태극기를 모두 빼앗겼다.
1919년 3월 1일, 박의송은 김찬성, 김화식, 김희주, 김병제, 김병건, 전성걸, 전예순, 김영원, 이인택, 최승준(崔承俊) 등과 함께 안주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3월 1일 오후 5시, 읍내 서문 앞에 많은 군중이 모이자, 박의송은 청년 대표들과 함께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군중과 함께 건인리(建仁里) · 청교리(淸橋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에는 300~4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에서는 처음에는 당황하여 방관만 하였으나,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즉시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헌병대는 박의송, 김화식, 김희주, 김병제, 김병건, 전성걸, 전예순, 김영원 등 주동자 10여 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김찬성 목사는 피신하였다가 만주 길림 방면으로 망명하였다.
박의송은 1919년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이 되었지만 곧 순국하였다[이미 순국한 상태였다].
박의송은 실형을 선고받자 “이 좋은 기회에 자유 독립의 희망에 대해서 세계 공법에 의해서 동정을 표시하는 것이 하등의 죄 될 것이 아니므로 무죄 백방하길 바란다.”고 상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