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개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0일 군북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군북 장터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군북 경찰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히 대항하다 일제 군경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1892년 3월 22일 태어났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시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군북의 우국지사들이 3월 5일경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 모여 군북 장날인 3월 20일에 거사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시위 군중도 일제히 궐기하였다. 정오를 지나면서 장꾼으로 가장한 군중이 군북 냇가에 3,000여 명 모였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 경찰주재소의 경찰과 그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 대열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오후 5시경 5,0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일제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일본 군경은 주동자를 향해 40여 발을 발사하여 조용규(趙龍奎), 박상엽(朴尙燁), 조주규(趙周奎), 송문호(宋文鎬), 조용대, 김우곤(金宇坤), 박주범(朴主範), 조용섭(趙鏞燮), 이원필(李元弼), 이재형(李在衡), 김삼도(金三道), 나수범(羅守凡), 조용태(趙鏞台), 조성술(趙性述), 조성기(趙性基), 이경흠(李卿欽), 이경민(李卿敏), 박원개(朴元介), 박학숙(朴學淑)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유탄에 남녀 각 1명이 생명을 잃었다. 박원개는 이때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군북 의거에서 사망 21명, 부상 18명으로 사상자 수는 전국 5위이고 삼남 지방에서는 가장 많은 희생이 있었으며, 일본 군경의 상이자는 1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