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협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곽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6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던 중, 주동 혐의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3월 1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평안북도 곽산군 안흥(安興)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70년에 태어났고, 1919년 3월 15일 곽산군 안의리에서 사망하였다.
곽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2월경에 천도교회의 핵심 인사인 김진팔(金鎭八)이 서울에서 개최된 천도교 모임에서 3 · 1운동에 관한 밀령을 받고 평안북도 정주로 오면서 추진되었다. 곽산교구장 김경함(金庚咸)은 김진팔로부터 서울의 3 · 1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 측과 협의하여 3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6일, 천도교 측에서는 선언서를 역 근처와 주변의 각 동리에 배포하였고, 기독교 측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집집마다 나누어 준 뒤, 집회를 열자 읍내에 모인 군중은 1,000여 명이 되었다. 김경함이 먼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안의리(安義里)에 이르렀을 때, 박지협은 주동 혐의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 3월 1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체포된 시위 군중 100여 명 중 50여 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일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 대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으며, 광견(狂犬)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쇠갈고리로 시위 군중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 일명 '곽산의 참살(慘殺)'이라고도 불린다. 3월 3일부터 5월 말까지 만세시위 12회, 참가 인원 5,500여 명, 부상자 9명, 피검자 111명이었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