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본관은 수원(水原), 아호는 한빛, 도호는 혁암(爀菴)이다.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의 이론가·사상가·종교가로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무근(茂根)의 장남으로 경성국어보급학관 고등과를 마치고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다. 1907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종학원을 제1회로 수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군 월화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 2일 천도교청년회가 설립되자, 의주지회를 설치하고 대표를 맡았으며, 이후 천도교청년당 의주당부 대표 및 집행위원, 천도교청년당 중앙위원 및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 1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천도교의 주의와 목적」이라는 강연을 하였으며, 1928년 1월 28일 의주농민회 상무집행위원으로 의주군 고율면에서 농촌야학지도자강습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의주군 조선농민사를 설립한 후 경제부장,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농민사중앙회 쟁의부장 및 중앙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천도교청년당 농민부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말체조(丁抹體操: 덴마크체조)를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1934년 천도교청년당의 비밀결사인 오심당에 가입하였다가 발각되어 평양경찰서에 검거되어 옥고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을 창설하고 부도사장, 상주선도사, 천도교청우당 당학원장을 지냈으며, 6.25사변으로 월남한 후에는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교화원장, 상주선도사, 도정, 종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비상국민회의준비회 축하행렬책임자 등으로 활동하였다가, 1970년 2월 27일 7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