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11일에 정광진(鄭胱震) 등 11명이 모여 발기총회를 열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전쟁을 원인을 극복하고 평화의 세계를 모색하였다. 불교 관련 유학생들은 당시를 ‘개조(改造)’의 시대로 인식하고, 조선 불교의 미래를 위한 개혁을 목적으로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였다. 실무 조직으로 이사, 회계, 서기 등을 두었다.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1921년 4월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재일조선불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재일조선불교청년회는 1931년까지 국내 불교계와의 연계를 통해 불교 개혁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의 활동으로는 조선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기여한 점이 주목된다.
1910년대 이희광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합병하고자 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에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안에서 조동종이 포교하는 데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책동에 대항하여 박한영,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1911년 1월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3 · 1운동 이후인 1919년 10월 이회광은 다시 일본 불교와의 연합을 기도하였다. 재일 불교 유학생들은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일본 교토 임제종종립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 불교 유학생들이 반대 입장을 결의했다. 이후 일본 조동종대학 안에서 임시총회를 다시 개최하여 조선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면서, 동시에 국내 불교계의 개혁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회광 등의 임제종과의 연합 움직임은 재일조선불교청년회와 국내 불교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