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가 재정은 조용조(租庸調) 체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조용조는 전결(田結)에 부과되는 전세(田稅)와 호(戶)에 부과되는 공물(貢物), 사람에게 부과하는 역(役)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공물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직접 현물로 납부하거나 방납(防納)을 통해 대납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단계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백성이 쌀을 납부하면 선혜청에서 필요 물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공물이 선혜청으로 이관되었으나 일부 공물이 그대로 호조에 남았는데, 이를 ‘호조 공물(戶曹貢物)’이라 한다.
호조공물은 원공물(元貢物)·별무(別貿)·경기(京畿)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 등으로 구분된다. 원공물은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에 이관되지 않고 호조에 그대로 남은 공물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공물은 대동법을 설립하기 전부터 이미 호조에서 관장하여 공물을 조달하였기 때문에 대동법 시행 이후에도 그대로 호조에 소속시켰다. 선혜청에서는 황해도의 전답에서 매 결당 12두의 대동미(大同米)와 3두의 별수미(別收米)를 징수하여 해마다 양서공물가(兩西貢物價) 명목으로 호조에 보내주었다. 선혜청에서 호조에 지급한 양서공물가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을 기준으로 미(米) 2,494석, 전미(田米) 6,978석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호조공물을 마련하였는데, 호조가 책임지던 중앙 각사(中央各司)의 1년 공가(貢價)는 미(米) 2,917석, 무명[木] 648동 31필, 동전[錢] 557냥이었다. 호조에서는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공물가를 지급하였다.
별무는 공안(貢案)에 등재된 공물 외로 각 시기별 사정에 따라 추가로 공물을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별무에는 원공(元貢)에 없는 공물을 추가로 조달하는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와 원공 안에 있는 공물이 부족하여 수량을 추가하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로 구분되었다. 별무에 소요되는 공물가는 선혜청에서 별도로 지급받지 않고, 호조의 자체 재원으로 조달하였다.
경기 전세조공물은 본래 공물조(貢物條)로 거두는 부세가 아니었다. 전세조공물이란 조선 전기부터 일부 부족한 공물을 호조 전세 중에서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여 납부하게 하던 방식을 말한다. 대동법 시행 이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의 지역에서는 전세조공물이 사라지고 위미태(位米太, 조세로 바치던 쌀과 콩)로 전환되었지만, 경기 지역의 경우 계속해서 전세조공물이 유지되었다. 경기 전세조공물은 사도시(司䆃寺)·봉상시(奉常寺)·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 등의 공가(貢價)로 쓰였으며 매년 3월과 8월 두 차례로 나뉘어서 미(米) 3,063석과 콩(太) 1,240석을 지급하였다. 전세조공물은 매년 줄이거나 더하는 것 없이 고정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호조공물은 조선 전기부터 운영되었다. 전세조공물의 경우 대동법 시행 이후 하삼도와 강원도 지역은 위미태로 전환되었으나, 경기 지역만은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납부하는 양서공물가는 본래 두 도(道)에서 각각 중앙에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평안도에서 거둔 쌀을 중앙까지 수납하는 일이 번거롭고 황해도에서 평안감영에 납부하는 군향미(軍餉米)가 민간에 문제를 발생하자,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결국 1708년(숙종 24)부터 평안도에서 호조에서 납부하던 공물가를 황해도가 대신 납부하고, 황해도가 평안감영에 납부하던 군향미(軍餉米)를 없애는 것으로 하여 제도가 변경되었다. 이로써 호조에 납부하는 양서공물가는 모두 황해도에서 부담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공물 조달은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선혜청에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중앙각사의 호조공물을 계속해서 존속시켰을 뿐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는 선혜청에서 조달하고도 부족한 공물을 호조가 별무의 형태로 부담하게 한 것은 왕조 정부에서 호조가 갖는 재정적인 책임 때문이었다.
호조는 조선의 재정 운영을 총괄하고 책임지는 아문이었다. 따라서 공물 부족으로 인해 별무를 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호조는 별도로 공물가를 선혜청으로부터 제공받지 않고 자체 재정으로 공물을 마련해야 했다. 비단 공물만이 아니라 각종 재해나 부채 탕감으로 인해 재정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세법(稅法) 개정에 따른 손실분을 급대(給代)해야 할 경우, 불시에 국가적 행사가 벌어질 경우 등 계획된 정부의 예산 범위를 벗어난 지출이 생겼을 때는 호조가 그 책임을 지고 있었다.
호조공물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별무는 조선왕조 재정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왕실과 중앙각사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면서 전체적으로 소요되는 공물의 양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공안(貢案) 개정을 통해 공물수를 늘리는 것이 마땅했으나, 조선정부는 공안을 개정하지 않고 기존 공물에서 별무를 통한 추가 조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공안이 개정되면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공물가(貢物價)가 오를 수 있다는 점과 왕실과 중앙각사가 절용(節用)에 힘쓰게 하여 공물을 줄이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왕조 정부는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공물가를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부족한 공물을 계속해서 별무로 충당함으로써 중앙의 재정규모가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였다. 호조공물은 이러한 조선왕조의 재정 이념이 그대로 반영된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