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조선시대 호조에서 관장하던 공물을 말한다. 공물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직접 현물로 납부하거나 방납(防納)을 통해 대납하였다. 원공물(元貢物)·별무(別貿)·경기(京畿)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 등으로 구분된다. 원공물은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에 이관되지 않고 호조에 그대로 남은 공물을 말한다. 별무는 공안(貢案)에 등재된 공물 외로 각 시기별 사정에 따라 추가로 공물을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정부는 공안을 개정하지 않고 기존 공물에서 별무를 통한 추가 조달로 왕실과 중앙각사가 절용(節用)에 힘쓰게 하여 공물을 줄이도록 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호조에서 관장하던 공물.
개설
내용
별무는 공안(貢案)에 등재된 공물 외로 각 시기별 사정에 따라 추가로 공물을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별무에는 원공(元貢)에 없는 공물을 추가로 조달하는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와 원공 안에 있는 공물이 부족하여 수량을 추가하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로 구분되었다. 별무에 소요되는 공물가는 선혜청에서 별도로 지급받지 않고, 호조의 자체 재원으로 조달하였다.
경기 전세조공물은 본래 공물조(貢物條)로 거두는 부세가 아니었다. 전세조공물이란 조선 전기부터 일부 부족한 공물을 호조 전세 중에서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여 납부하게 하던 방식을 말한다. 대동법 시행 이후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강원도 등의 지역에서는 전세조공물이 사라지고 위미태(位米太, 조세로 바치던 쌀과 콩)로 전환되었지만, 경기 지역의 경우 계속해서 전세조공물이 유지되었다. 경기 전세조공물은 사도시(司䆃寺) · 봉상시(奉常寺) · 내자시(內資寺) · 내섬시(內贍寺) 등의 공가(貢價)로 쓰였으며 매년 3월과 8월 두 차례로 나뉘어서 미(米) 3,063석과 콩(太) 1,240석을 지급하였다. 전세조공물은 매년 줄이거나 더하는 것 없이 고정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변천과 현황
조선왕조의 공물 조달은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선혜청에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중앙각사의 호조공물을 계속해서 존속시켰을 뿐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는 선혜청에서 조달하고도 부족한 공물을 호조가 별무의 형태로 부담하게 한 것은 왕조 정부에서 호조가 갖는 재정적인 책임 때문이었다.
호조는 조선의 재정 운영을 총괄하고 책임지는 아문이었다. 따라서 공물 부족으로 인해 별무를 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호조는 별도로 공물가를 선혜청으로부터 제공받지 않고 자체 재정으로 공물을 마련해야 했다. 비단 공물만이 아니라 각종 재해나 부채 탕감으로 인해 재정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세법(稅法) 개정에 따른 손실분을 급대(給代)해야 할 경우, 불시에 국가적 행사가 벌어질 경우 등 계획된 정부의 예산 범위를 벗어난 지출이 생겼을 때는 호조가 그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Ⅲ(김옥근, 일조각, 1988)
- 「조선초기 전세조공물 연구」(박도식, 『인문학연구』8, 2004)
- 「조선초기의 전세공물」(강제훈, 『역사학보』158, 1998)
- 「조선초기 포화전에 대한 일고찰」(이재룡, 『한국사연구』9, 1995)
- 『李朝貢納制の硏究』(田川孝三, 東洋文庫, 1964)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