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월과화약계 ()

조선시대사
단체
조선 후기 진휼청에 속해 있던 공계(貢契) 중의 하나.
이칭
이칭
삼남월과화약계인(三南月課火藥契人), 삼남월과계(三南月課契), 월과계(月課契), 월과계인(月課契人)
정의
조선 후기 진휼청에 속해 있던 공계(貢契) 중의 하나.
개설

삼남월과화약계는 1704년(숙종 30) 진휼청(常賑廳)이 화약(火藥)을 공물로 새롭게 지정함에 따라 등장한 공계이다. 삼남월과화약계가 조직된 이후 화약 제조업자들은 조정으로부터 화약 값을 지급받고, 그에 해당하는 화약을 만들어 조달하였다. 각 군문과 진에서 필요한 화약은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졌으므로, 삼남월과화약계인은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무기의 사조(私造)와 사매(私賣) 행위 금지를 골자로 하는 「조총화약제조절목(鳥銃火藥製造節目)」이 반포되면서 화약 제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설립목적

각 군현이 매달 납부해야 할 월과화약(月課火藥)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정은 임진왜란 중 군기를 보강하기 위한 방안으로 「월과총약환법(月課銃藥丸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이 제정되자, 조정은 군현의 규모에 따라 일정량의 조총·화약·연환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각 읍에서는 새로운 무기를 제조할 원료를 얻기가 어려웠고, 또 제조할 기술자를 확보할 길도 없었다. 이 때문에 조정은 당시의 조총·화약·연환의 생산가를 기준으로 공정가를 설정하고, 군현에서 제조할 수 없을 경우 구입하여 납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기의 판로를 노린 광산업자들이 신종의 광산 개발에 착수하였고, 인력의 수급이 용이한 서울의 부민들은 총약환제조장(銃藥丸製造場)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무기의 방납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로 군현의 월과가(月課價)가 대동미에 포함됨으로써 방납 행위가 어려워지자, 이들은 진휼청(常賑廳)과 결탁하여 방납권을 되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1685년(숙종 11)에는 연환을 진휼청 공물로 이속하고 삼남월과연환계(三南月課鉛丸契)를, 1704년(숙종 30)에는 화약을 진휼청 공물로 이속하고 삼남월과화약계(三南月課火藥契)를 창설하였다. 화약이 공물이 된 이후 진휼청은 매년 일정량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계인은 안정적이면서 지속적인 이익 창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각 군현의 월과화약만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각 군문에 필요한 화약을 조달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1729년(영조 5) 「조총화약제조절목」의 반포로 5군문, 군기시, 진휼청에서만 화약을 제조하게 되었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월과화약은 군기시의 공인이 전담하게 되면서 삼남월과화약계는 오직 월과화약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남월과화약계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삼남월과화약계는 삼남의 월과화약의 수가제납(受價製納) 뿐만 아니라 이밖에 삼남을 제외한 각도의 군현 및 각진(各鎭)과 진보(鎭堡)의 월과화약도 제조 판매하였으며, 사포수(私砲手)들의 화약까지도 판매하였다. 따라서 계인들은 공사간(公私間)에 광범위한 판로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즉, 삼남월과화약계는 국내 최대의 화약 조달기관이었던 것이다.

현황

진휼청은 낭청 1인을 두어 계인들의 수가제납을 관장하였고, 계인들은 진휼청으로부터 계인첩(契人帖)을 발급받아 공인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았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삼남월과화약계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계인들은 진휼청으로부터 본년(本年)과 간년조(間年條)에 각각 쌀 804석 8두 1승과 1,676석 9두 3승을 각각 지급받았다. 이때 본년의 804석 8두 1승은 쌀 268석 8두 1승, 무명 16동 4필, 동전 1,608냥으로, 간년조의 1,676석 9두 3승은 쌀 558석 13두 3승, 무명 33동 26필 21척, 동전 3,353냥 2전으로 섞어 지급받았다. 화약 1근은 3두 3승씩이었으므로 본년에는 3,657근, 간년조로는 7,621근의 화약을 만들어 납부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남월과화약계는 조선 후기 군사무기의 조달 과정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군현에 분정하여 직접 조달하던 화약은 대동법을 기점으로 수가제납(受價製納)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수가제납이 이루어지면서 화약 제조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공계를 신설하여 화약 독점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므로 삼남월과화약계는 조선 후기 수공업사의 일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만기요람(萬機要覽)』
「조선후기 공인에 관한 일연구(중): 삼남월과화약계인의 수가제납실태를 중심으로」(유승주, 『역사학보』78, 1978)
「조선후기 공인에 관한 일연구(하): 삼남월과화약계인의 수가제납실태를 중심으로」(유승주,『역사학보』79, 1978)
「조선후기 공인에 관한 일연구(상): 삼남월과화약계인의 수가제납실태를 중심으로」(유승주, 『역사학보』71, 1976)
집필자
송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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