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을 설립한 조선음식 전문가이다.
1871년 출생했다. 본관은 순흥으로, 안향(安珦)의 21세손이며, 호는 죽농이다. 안아버지 순식(安舜植)과 청주 한씨(韓氏)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막내이다. 1887년 16세에 서당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평소에는 유학 소양을 강조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1896년에는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였고, 뒤이어 무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생활의 어려움으로 그만두었다. 다만 이 때 마음에 새긴 ‘성근정직(誠勤正直)’을 삶의 좌표로 삼았다. 1932년 안순환에서 안교환(安敎煥)으로 개명했다. 1942년 일월시보사 사장으로 재임 중 10월 1일 사망했다.
1899년에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전환국(典圜局) 건축 감독이 되어 궁중의 일을 처음으로 맡았다. 그 뒤 전환국 기수(技手)를 거쳐 국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궁내부(宮內府) 전선사 장선(掌膳)과 주선과장(主膳課長)을 지냈는데, 점차 나인, 별감, 내시 등의 인원이 축소되었고, 1907년에는 궁내부마저 총감부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정3품의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에 올랐지만, 몇 달 뒤에 스스로 사퇴하였다.
사퇴할 때 궁내부에 소속된 궁중의 남자 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를 모아, 1909년에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건너편에 조선 궁중 요릿집인 명월관을 열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지금의 명동에 또 다른 조선 요릿집인 식도원(食道園)을 설립하였다. 1930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구로구에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웠다. 그 뒤 유교 부흥을 위해서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려고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면서,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선의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대령숙수이자 최고의 근대 주방장, 뛰어난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