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리는 관덕정은 1749년(영조 25)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백상(閔百祥)이 건립한 건물로, 별무사(別武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는 도시(都試)를 실시하는 도시청(都試廳)으로 사용되었다. 그 위치는 대구읍성 남문 밖 서남 200보 지점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이다.
관덕정 마당 가운데에서도 ‘관덕정 마루’로 불리던 아미산(峨媚山) 등성이는 쓸모없는 땅으로,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참수형으로 처형하는 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동학(東學)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1864년(고종 1)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또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의병들이 총살당한 장소이다.
관덕정 마루의 형장이 우리 역사에서 특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15년(순조 15) 을해박해 이후로 천주교 신자 25명이 이곳에서 여러 차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을해박해 때 청송 모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에서 체포된 김종한 등 7명이 1816년 관덕정에서 참수되었고, 1827년(순조 27) 정해박해 때 상주 지방에서 붙잡힌 박사의 등 3명과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김해 지방에서 체포된 박대식이 1839년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 아울러 병인박해 때인 1866년(고종 3)부터 1868년(고종 5)까지 김해, 밀양 등지에서 붙잡힌 신자 14명이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 이처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이윤일이 1968년에 시복되고, 1984년 시성되었으며, 김종한 등 11명이 2014년 시복되었다.
관덕정이 도시청의 기능을 상실하자 1906년 대구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관덕정을 수리해 사범학교를 개교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곧 문을 닫았다. 관덕정 마당은 1917년부터 남문시장으로 바뀌었다가, 1937년 남문시장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간 뒤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천도교 측의 김연국(金演國)이 최제우의 처형장임을 고증한 뒤 관덕정을 성지로 기념하기 위해 사들였고, 그 뒤 그의 아들들이 ‘상제교(上帝敎)’라는 간판을 달았으며, 해방 후에는 시천교의 대구지부 사무실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관덕정은 헐려서 사라졌다.
이후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하여 순교 터로 고증된 땅 512.40㎢를 확보한 다음, 1985년 착공하여 1990년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형식의 건물을 완공해 1991년 5월에 개관식을 가졌다.
지하 1층은 경당, 유해 안치소, 제1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경당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돌 제대와 영정 등이 있고, 1902년 대구 본당 신자들이 고딕식 성당을 짓고 봉헌한 첫 번째 제단을 활용해 만든 유해 안치소에는 성 앵베르 주교, 성 김대건 신부, 성녀 칸디다를 비롯한 성인 · 성녀 등의 유해 46위가 있다. 제1전시실에는 대구대교구의 발전사를 보여 주는 기록사진을 비롯하여 초대 교구장의 주교좌 및 장궤틀, 교황 바오로 2세가 사용한 교황좌 등이 전시되어 있다.
1층 제2전시실에는 이윤일 성인의 영정과 한국 순교성인 103위의 영정,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으며, 2층 제3전시실에는 한티 · 신나무골 등의 교우촌과 순교자 관련 유물 · 서적, 파리외방선교회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3층의 제4전시실에는 초대교구장인 드망즈 주교와 교구 초창기 관련 유물, 각종 성물과 옛 교리서 기도서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벽면에 이윤일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의 발전사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화가 있다. 옥상의 한옥 누각은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모습, 예수가 십자가를 진 모습 등이 단청에 묘사되어 있다.
2013년부터 천도교 측은 ‘수운 최제우 순도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관덕정에 그의 순교를 기리는 비를 시민 모금으로 세우고자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