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 14일 서울 옥인동에서 부친 정창인(鄭昌寅)과 모친 최발바라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부친은 천주교인이 아니었고 모친이 천주교인이었는데, 당시 박해시기였기 때문에 천주교인임을 숨기고 결혼하였다. 모친으로 인해 천주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900년 3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학당 한문과를 마쳤고, 1903년 경성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17세 때인 1903년 탁지부 토지조사국 조사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4년 3월 종현성당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1908년 6월 견진(堅振)을 받았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근무하였으며, 1920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부 재무주임으로 있었다.
1923년 모친과 뮈텔(Mutel) 주교의 권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종현성당의 회장이 되어 경성교구의 재단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종현성당 구내의 ‘홍길동 집’에 수용되어 있던 노인들도 돌보았다. 경성교구는 1924년 10월 27일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재단이 설립되었다.
1924년 4월 자선을 위한 ‘애긍회(哀矜會)’를 조직하여 노인들을 돌보았고, 1926년 11월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1가) 2정목 93번지에 집을 매입하여 노인들을 수용하여 양로원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공간이 협소해지자 1930년 3월 23일 하왕십리 955번지에 가옥을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하왕십리의 공간도 점차 좁아져서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1936년 11월 4일 고양군 뚝도면 송정리 38번지(현 서울 성동구 송정동)의 땅을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하고 양로원을 이전하였다.
1950년 6월까지 양로원에 수용되었거나 수용된 인원은 총 267명이었고, 당시까지 생존 인원은 27명이었다. 양로원 초기에는 애긍회를 통한 보조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정남규 개인의 사회사업이 되어 아들과 며느리, 딸의 수입에 의존하며 양로원을 운영하였다. 서예에도 재주가 있어 1925년 뮈텔 주교가 79위의 복자 시복을 위하여 황사영 「백서」원본을 교황청에 보낼 때 이「백서」를 필사하였는데, 현재 그 필사본이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6일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어 납북된 뒤로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