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지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 지냈다.
이 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黃沁)을 만나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총 122행, 도합 13,384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는 1801년 6월 북경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황심도 음력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황심의 자백으로 배론에 숨어 있던 황사영마저 음력 9월 29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면서 백서(帛書)도 발각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 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G.C.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었다.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