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림서원 ()

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김성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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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김성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1821년(순조 21)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제향하기 위해 치암(耻庵) 최상우(崔祥羽) 등의 진주 사림과 김성일의 후손들이 협력하여, 1822년(순조 22)에 건립하였다. 이후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가 추향(追享)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못하였다.

역사적 변천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가 지은 「경림서원중건기(慶林書院重建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을 추모하는 사우들이 성내에 건립되었지만 학봉 김성일만이 빠져있던 것을 안타까워한 진주지역 부로(父老)들이 1762년(영조 38) 김성일을 제향하는 사우를 건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공사를 마치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 이후 1821년에 최상우를 비롯한 진주의 사림들이 다시금 학봉 김성일을 제향하는 사당을 건립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때 안동에 사는 학봉의 본손 김경찬(金璟燦)을 비롯한 문족(門族)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서원 건립비용을 일부 부조(扶助)하는 등 후손과 진주 사림들의 노력으로 1822년 진주의 개경리(開慶里)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이때 위패를 봉안한 사당은 ‘존덕사(尊德祠)’라 하고, 경림서원이라고 불렀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진양속지(晉陽續誌)』에는 학봉 김성일 외에도 대소헌 조종도를 제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종도가 언제 추향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일의 위패를 봉안할 당시 축문은 유범휴(柳範休)와 유심춘(柳尋春)이 지었으며, 봉안문은 퇴계 이황의 9세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지었다.

『학봉집』 부록의 「연보(年譜)」에는 1823년(순조 23) 4월에 김성일의 위패를 경림서원에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822년 2월에 유범휴와 유심춘이 「경림서원학봉선생상향축문(慶林書院鶴峯先生常享祝文)」을 찬하였고, 1822년 정월에 강필효가 「경림서원중건기」를 찬한 것을 보았을 때, 1821년에 경림서원의 중건을 시작하여, 늦어도 1822년 정월에는 공사를 마쳤으며 그해 2월에 위패를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진주지역은 남명학파의 본산으로서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인 학봉 김성일과 남명 조식의 제자인 대소헌 조종도가 함께 제향된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고만 볼 순 없다. 먼저 김성일이 진주에서 제향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593년(선조 26) 진주성의 진중에서 병사(病死)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또한 1592년 5월에 김성일이 촉석루에 올라서 지었다는 삼장사시(三壯士詩)가 전하면서 20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후인들이 경모(敬慕)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진주 내에서의 평가는 학파와 당파를 초월하여 진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현인(賢人)으로 추숭하였다.

조종도는 임진왜란 이전에 안기도 찰방 재임시 김성일·유성룡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뒤 재야에 은거해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초유사(招諭使)로 내려온 김성일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 모집에 진력하였고, 김성일이 촉석루에서 ‘삼장사’ 시를 지을 때도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 진주성 전투에도 함께 참전하여 왜적을 방어하였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학파와 당파를 불문하고 함께 경림서원에 제향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경림서원은 진주 사림의 공의에 의하여 건립되었지만, 19세기 이래로 대부분의 서원이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던 상황 속에서 실제 운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서원이 철거된 후 여타의 서원들이 복설되는 추세에서도 그것을 주관할 주체가 없었기에 현재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진주지역에 남인계 인사를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은 진주지역 사림의 학문적·정치적 성격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강고집(江皐集)』
『광뢰집(廣瀨集)』
『교남지(嶠南誌)』
『진양속지(晉陽續誌)』
『학봉집(鶴峯集)』
『해은선생유고(海隱先生遺稿)』
『향산집(響山集)』
『호곡집(壺谷集)』
『경남의 서원』(구산우 외, 선인, 2008)
『내 고장의 발자취』(진주문화원, 2006)
『진주누정지』(진주문화원, 1995)
『진주시사』(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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