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학자로서 의령에 우거(寓居)한 거유(巨儒) 허목(許穆, 1595∼1682)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기 위하여 1825년(순조 25)에 남인계 인사들과 양천허씨(陽川許氏) 후손들의 발의로 세워진 서원이다. 그 후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에 이의정(二宜亭)을 지었으며, 1975년에 복원하였다. 강당 1동이 2014년 9월 25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825년에 건립된 서원은 원래 행정리에 있었다. 1868년에 훼철된 이후 허목의 영정은 종손이 사는 경기도 연천(漣川)으로 옮겼으며, 후손들과 후학들이 추모의 뜻을 모아 1901년 중촌리에 이의정으로 이름을 바꿔 중건하였다. 1920년에 침랑(寢郞) 정영훈(鄭英壎)과 그의 재종제(再從弟) 정섭기(鄭攝基)가 많은 재력을 내고, 허목의 방계 후손이자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의 제자인 소와(素窩) 허찬(許巑, 1850∼1932)이 도와서 위패를 봉안할 사당인 숭정사(崇正祠)와 『미수기언(眉叟記言)』 책판을 보관할 장판각을 건립하였다. 서원 건립 당시에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지었다.
허목은 본관이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 ·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섬겼다. 병자호란 이후인 1638년(인조 16)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는데, 이후 허목은 의령지역과 계속 연고를 갖게 되었다.
특히 『미수기언』 책판은 총 921장 중 일부가 유실되어 현재는 869장이 남아있는데,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원집이 67권, 별책이 26권인데, 원집은 허목 자신이 스스로 편찬한 것이고, 별집은 그의 사후 문인들이 만든 것이다. ‘기언(記言)’이란 그의 자서(自敍)에서 “말은 군자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면 반드시 써서 날마다 반성하고 실천에 힘써 왔는데 이렇게 모은 글을 ‘기언’이라 한다.”라고 밝혔다.
『미수기언』은 1689년(숙종 15) 왕명에 의해 전라도 나주 미천서원(眉泉書院)에서 처음 간행되었고, 1881년(고종 18)에 의령에 사는 이석홍(李錫弘)이 그의 스승인 허전의 권유로 허목이 지은 『경례유찬(經禮類纂)』을 간행하자, 1905년에 허찬(許巑)이 중심이 되어 『미수기언』을 중간하였다.
건물로는 정문인 솟을대문의 인지문(仁智門)과 숭정사, 이의정, 장판각, 사적비 등이 있다. 사당인 숭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강당인 이의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기와집으로 가운데는 마루이며, 왼쪽은 2칸, 오른쪽은 1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앞쪽의 마당에는 ‘문정공미수허선생사적비(文正公眉叟許先生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장판각에 보관했던 『미수기언』 책판 869매는 현재 의령읍 의병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외에도 서원에는 기옹(頎翁) 허승(許乘, 1769∼1813)의 유품 20점을 보관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낸다.
미연서원에 보관해온 『미수기언』 책판은 허목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