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방촌(芳村) 이당(李瑭, 1567∼1644)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한 국일사(菊逸祠)를 1980년에 중건하면서 국산서원(菊山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이때 이당의 6대조 양헌공(襄憲公) 이원(李原, 1368∼1430)을 함께 배향하였다.
1980년에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의 8세손인 이당을 제향하기 위해 고성이씨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이당은 원래 청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등과 함께 제향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고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해면 외곡리에 국일사(菊逸祠)을 창건하여 제향하였다. 후에 건물이 낡고 기울어져 후손 이경철(李敬哲)과 이원수(李元秀)가 주간하여 1980년에 새로 중건하였는데, 이전에 비하여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원 역시 청도 명계서원(明溪書院), 안동 명호서원(明湖書院)에서 망헌(忘軒) 이주(李胄)와 함께 배향되었는데, 훼철된 후 위패를 봉안한 곳이 없어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이원은 본관이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이며,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이강(李岡)이다.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1400년(정종 2) 좌승지 때 방원(芳遠)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그 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1409년(태종 9)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서원의 규모는 강당 4칸, 사당 3칸, 문랑 3칸과 포사(庖舍) 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사당인 경의사(景義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문랑(門廊)은 솟을대문이다.
문중 사우에서 서원으로 변화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