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영조 14)에 함종어씨와 함안이씨의 문중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월정(月亭) 어연(魚淵)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과 손자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을 비롯하여 무진부사를 역임한 이운길(李云吉), 남원부사를 역임한 이의형(李義亨)을 함께 제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못하였다.
어변갑, 어효첨 부자가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현달하였기에 그의 후손들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서원이다. 어변갑은 보문각 직제학 성사제(成思齊)의 딸인 창녕성씨(昌寧成氏)와 혼인하여 어효첨을 낳았다. 어효첨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그로 인해 어변갑 또한 이조판서 겸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서원에는 이들 외에도 어연, 이운길, 이의형 등을 함께 제향하였는데, 대구현령 어연은 어변갑의 아버지였으며, 무진부사 이운길은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운길의 고손자가 되는 이의형은 어변갑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함종어씨 집안의 외예(外裔)가 된다.
함종어씨의 문중 서원 성격을 가진 곤의서원에서 함안이씨 인물들을 제향한 것은 조선 후기 고성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의형이 고성의 북쪽 오방산 아래 신리(新里)에 세거한 이래로 그의 아들 이후가 마암(馬巖)에서 살았으며, 고손자인 이달(李達)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양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즉 곤의서원이 위치한 마암면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재시사족이 이의형의 후손들인 함안이씨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 후기 들어 사환(仕宦)이 어려웠던 함종어씨들은 현조(顯祖)의 권위와 지역의 유력 사족인 함안이씨와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함안이씨를 서원 건립 및 운영에 동참시킬 구실로서 이운길, 이의형을 함께 제향했다. 즉 그들의 입향조인 이의형과 그의 고조할아버지이자 어변갑의 외할아버지인 이운길 및 그의 사위인 어연을 추가함으로써 나이에 따라 이운길, 어연, 어변갑, 어효첨, 이의형 순으로 제향하였다. 그 결과 두 가문의 인물이 제향됨에 따른 위차 시비 등도 피하고 두 가문의 위상도 현실에 맞춰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1844년(헌종 10) 마암면에 함안이씨가 위계서원(葦溪書院)을 건립하면서 곤의서원에 대한 함안이씨들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훼철 이후 복설되지 못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곤의서원은 어변갑의 호를 따라 면곡서원(綿谷書院)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점에서 곤의서원의 건립 주체가 함종어씨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전하는 자료에 두 서원명의 선후 관계는 확인이 안 되지만 동일한 인물들이 제향되었던 점에서 같은 서원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문중 서원의 다양한 건립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