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의 유허(遺墟)는 청강(菁江)의 위쪽, 비봉산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1838년(헌종 4)에 진주의 동쪽에 위치한 도동리(道洞里)에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묘소 앞에 건립되었는데, 진주 사림의 공의로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된 삼상신(三相臣)이라 불렸던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1857년(철종 8)에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옥사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정분의 아버지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을 함께 추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복설되지 못하였다. 『진양속지(晉陽續誌)』에는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종을 위해 죽은 삼상(三相)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배향한 서원으로, 삼상 중 정분은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이오의 아들이다. 정분은 1452년(문종 2) 문종이 승하할 때 김종서·황보인과 더불어 어린 세자인 단종의 보호를 부탁받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53년(단종 1)에 전라·충청도의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전라도 낙안(樂安)에 감금되었으며, 결국 관노(官奴)로 전락되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뒷날 신원(伸冤)이 되어 사화 공신으로 뽑혔다.
이들 삼인의 도동서원 상향문(道東書院常享文)은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도동서원 강당 상량문은 오연(梧淵) 김면운(金冕運)이 지었다. 1857년 추향시에는 진주목사 심원열(沈遠悅)이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을 지었다. 단종 복위 운동으로 옥사한 김문기도 이때 추향되었는데, 함께 추향된 정이오와 하락은 진주 출신의 문신·학자로서 정분·김종서·황보인·김문기 등과는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다. 하지만 서원의 운영상 진주정씨, 진주하씨 문중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함께 추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이 훼철된 후 1914년에 도동서원유허음기비(道洞書院遺墟陰記碑)를 세웠다. 유허비명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가 지었다.
조선 후기 단종의 복위와 함께 신원된 자들의 제향 추이를 파악할 수 있는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