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철종 12)에 이시애(李施愛) 난을 평정한 장양공(莊襄公) 정준(鄭俊, ?∼1467)을 제향하기 위해 사림의 공의로 세운 서원이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될 당시에는 신계사(新溪祠)로 기록되어 있다. 1956년에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사당만 짓고 서원 건물 등은 보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붕괴되자 1994년 4월에 서원 건물만 다시 세우고, 2000년 6월에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현재의 상태로 복원하였다.
제향자인 정준은 본관이 초계(草溪)이며,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1460년(세조 6) 신숙주(申叔舟)의 모련위(毛憐衛) 정벌에 공이 있어 훈도(訓導)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온성절제사로서 잠입하여 온 야인을 추격, 사살하는 등 북방에서 무위를 떨쳤으나, 1466년 8월 영흥부사로 있으면서 조정 명령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추국당하였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의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훈되고, 자선대부(資善大夫)로서 호분위대호군(虎賁衛大護軍)에 임명되고, 풍성군(豊城君)으로 봉하여졌다가 초계군(草溪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서원의 외삼문은 충의문(忠義門)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기와집으로 가운데는 마루이며 양쪽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음력 10월 7일에 향사를 지낸다. 서원 내에 『신계서원집사록(新溪書院執事錄)』, 『신계서원임원록(新溪書院任員錄)』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