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집(東亭集)』은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동정집』에 관한 기록은 『용재총화』 권8,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용재총화』에는 그 분량이 1질이라고 하였다. 현전하는 그의 시문은 7언절구 〈침류정(枕流亭)〉이 『동문선』 권22에 1수, 『대동시선』 권1에 3수가 뽑혀 있다. 침류정은 그가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에서 귀양살이 할 때 물가에 걸터앉은 모양으로 지은 정자이다. 이색(李穡, 1328~1396)이 〈침류정기(枕流亭記)〉를 지어주었다.
염흥방은 본관이 서원(瑞原: 파주)이고, 호가 동정(東亭)이다.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 1364~1382)의 아들로,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홍건적을 물리치고 제주도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으나, 당시 권신(權臣)이던 이인임(李仁任, ?1388)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등과 유배되기도 하였다. 젊어서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았고 개혁을 주창하였지만, 간신 임견미(林堅味, ?~1388)와 사돈이 된 후로 청렴한 문신들을 몰아내고 매관매직을 자행하며 남의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였다. 그가 주살되자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은 『고려사』 권126 「임견미열전」에 자세하다. 이색이 지은 〈어은기(漁隱記)〉는 그의 다른 호(號)에 대한 기문으로, 위인(爲人)을 미화해 놓고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