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선집(求善集)』에 대한 기사는 『고려사』 권94 「강감찬열전」,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강감찬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성남(城南)의 별장에서 지내면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함께 지었다고 한다. 현전하지 않아 서지사항과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구선(求善)’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처세(處世)와 관련된 성격의 책으로 짐작된다. 조선 말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최충(崔沖, 9841068)이 『구선집』을 지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2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고 하였으나, 잘못으로 보인다. 강감찬이 구주대첩(龜州大捷)을 이끈 무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만년에 문집을 저술했음은 주목되는 일이다.
강감찬은 금주(衿州: 경기 시흥)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현종 때 거란 군대를 물리치고 개선하자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 황해도 우봉)에 나아가 연회를 베풀고, 장군과 병졸들에게 금화(金花)를 손수 머리에 꽂아주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속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체격이 왜소하고 외모가 못생겼으나 나랏일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 “문곡성(文曲星: 글재주가 높은 사람을 칭찬하는 말)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지금 여기에 계셨군요.” 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는 『고려사』 외에 『고려사절요』 권3의 「강감찬 졸기(卒記)」(현종 22년 8월)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의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인물 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