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권98 「김부식열전」과 『고려사절요』 권11의 「김부식 졸기(卒記)」(의종 5년 2월)에 “문집 20권이 있다.”고 하였다. 타 문헌에서는 김부식 문집의 정확한 명칭이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중기 학자 김휴(金烋, 1597~1638)가 『해동문헌총록』을 편찬하면서 문집의 실물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고려사』의 기사를 참조하여 ‘김부식문집(金富軾文集)’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집명에 호나 당호를 붙이지 않고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드러낸 점에서 그러하다. 문집이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김부식은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하여 정지상(鄭知常, ?~1135)과 당대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동문선』에 한시 30여 수와 산문 70여 편이 뽑혀 있다. 「결기궁(結綺宮),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 「등석(燈夕)」, 「동궁춘첩자(東宮春帖子)」, 「문교방기창포곡가유감(聞敎坊妓唱布穀歌有感)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부식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자가 입지(立之)이다. 외모가 풍후(豊厚)하고 체구가 크며,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숙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김부식의 문장과 인물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의 세가(世家)를 실었으며, 형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가 판목(板木)에 새겨 전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