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경시집(金良鏡詩集)』에 관한 기록은 『허백당집(虛白堂集)』 권6과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성현(成俔, 1439~1504)이 「김양경시집서(金良鏡詩集序)」를 지었다. 후손 가구(可搆)가 한시 수십여 수(首)를 모아 유고(遺稿)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문집이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동문선』에 한시 9수와 산문 5편이 전하고 있다. 그는 청신(淸新)한 시를 잘 지었는데, 〈서대관전보좌후장무일도상(書大觀殿黼座後障無逸圖上) 〉과 〈궁사(宮詞)〉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양경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후에 인경(仁鏡)으로 개명하였다. 문(文)·무(武)·이(吏) 세 가지 재능을 겸비하였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조충(趙沖, 1171~1220)을 따라 거란을 토벌한 공로가 있었다.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근체시(近體詩)와 부(賦)를 잘 지었으므로 「한림별곡(翰林別曲)」(『고려사』 권20 「악지(樂志)」 2)에서 “양경시부(良鏡詩賦)”라 칭송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