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高麗詩)』에 대한 기록은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송(宋)나라 마단림(馬端臨, 1254~1323)이 편찬한 『문헌통고(文獻通考)』에 3권이 실려 있으며, 고려 사신 이강손(李絳孫)이 서문을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문헌총록』의 기록은 『보한집』, 『고려사』 등의 관련 기사와 비교해 보면 사행(使行)의 선후와 서문의 대상에 일부 착오가 있다.
1071년(문종 25)에 김제(金悌), 박인량(朴寅亮, ?~1096), 배모(裵某), 이강손(李絳孫), 노유(盧柳), 김화진(金化珍) 등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70여 편을 창화(唱和)하여 『서상잡영(西上雜詠)』이라 이름을 붙이고 이강손이 서문을 지은 바 있다(『해동역사』 권43 예문지(藝文志) 2 「경적(經籍)」). 그리고 1081년(문종 35)에 최사제(崔思齊, ?~1091), 이자위(李子威), 고호(高琥), 강수평(康壽平), 이수(李穗) 등이 조공을 바치러 송에 갔는데, 정월 보름에 동궁에서 잔치를 할 때 신종(神宗)이 어제시(御製詩)를 관반(館伴)인 필중행(畢仲行)에게 내리자, 필중행과 이들 5인이 화답시(和答詩)를 지어 올렸다고 한다. 『문헌통고』에는 이 2건의 고려 사신들의 저작을 통칭하여 ‘고려시’라는 항목으로 수록한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곧 『해동문헌총록』 소재 『고려시』의 주석에 이강손이 서문을 썼다는 기술은, 이강손이 김제, 박인량 등과 함께 사신으로 간 것을 감안할 때 『서상잡영』의 서문으로 이해된다.
한편 박인량이 1080년(문종 34)에 유홍(柳洪, ?~1091)과 함께 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송나라 사람들이 박인량과 김근(金覲)의 척독(尺牘), 표장(表章), 제영(題詠)을 보고 칭찬하여 『소화집(小華集)』을 간행해 준 바 있다(『고려사』 권95 「박인량열전」). 박인량의 「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동문선』 권12)와 최사제의 「입송선상기경중제우(入宋船上寄京中諸友)」(『동문선』 권19)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며 지은 시들이다. 『서상잡영』과 『소화집』이 현전하지는 않으나, 고려 전기 송나라와의 문인교류 및 문학 수준의 일면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