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루창화집(龍樓唱和集)』은 줄여서 『용루집(龍樓集)』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용루창화집』에 관한 기사는 『역옹패설』 전집1, 『지포집』 권2, 『삼봉집』 권12, 『동인시화』 권하,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역옹패설』에 의하면, 충렬왕(재위 1274~1308)과의 창화에는 김구와 조영 외에도 이송진(李松縉)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동인시화』에는 고려시대에 예종, 인종, 명종, 충렬왕 등이 문아(文雅)·유아(儒雅)를 숭상한 군주라고 일컬었다. 예종은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을 남긴 바 있다.
김구는 본관이 부안(扶安)이고, 자가 차산(次山)이다. 고종 때에 급제하고 문장이 당대에 최고였는데, 원나라 학사 왕악(王鶚, 11901273)이 김구가 지은 표문(表文)을 볼 때마다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가 최충헌(崔忠獻, 11491219) 부자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변변찮게 여겼다. 일찍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북정록(北征錄)』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지포집』은 조선 정조 연간에 후손들이 『동문선』, 『고려사』 등에서 유문(遺文)을 수습한 것이다. 그는 『동문선』에 12수의 시가 뽑힐 정도로 고려시대의 주요 시인으로 꼽히며, 「과철주(過鐵州)」, 「낙이화(落梨花)」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한편, 조영은 행적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동문선』 권14에 7언율시 「척촉화응교(躑躅花應敎)」 1수가 전하고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