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은집(樵隱集)』에 관한 기록은 『용재총화』 권8, 『대동운부군옥』의 「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고려사』 권112 「이인복열전」에는 문집에 관한 언급이 없다. 『용재총화』에 『초은집』이 1질(秩)이라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시문은 『동문선』에 한시 27수와 산문 3편이 뽑혀 있다.
이인복은 본관이 성주(星州), 자가 극례(克禮), 호가 초은이다.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손자이다. 충숙왕 때 19세의 나이로 급제하고 또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합격하였다. 사람됨이 정대하고 근후(謹厚)하며 예의로써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는데, 당대의 외교문서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민지(閔漬, 1248∼1326)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改撰)하고 충렬·충선·충숙왕의 3대 실록과 『고금록(古今錄)』, 『금경록(金鏡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후에 신돈(辛旽)의 뜻을 거슬러서 파직되었다가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아우 이인임(李仁任)이 염불할 것을 권하자, “나는 평소 부처에게 아첨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스스로를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