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의 문집명이 『최상국집(崔相國集)』으로 기록된 예는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에 보인다. 8권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 권102 「최자열전」에는 “가집(家集) 10권이 세상에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종2품 이상의 관원, 즉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문집명에 ‘상국’이라 붙인 것이다. 문집이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시문은 『동문선』에 부(賦) 2수, 한시 12수, 산문 15편 등이 뽑혀 있으며, 대표적인 시작(詩作)으로 「국자감직려문채진봉학려(國子監直廬聞採眞峰鶴唳)」가 알려져 있다. 한편 그가 지은 시화집(詩話集)으로 『보한집』 3권이 현전하고 있어, 고려시대 비평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자는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가 수덕(樹德)으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말수가 적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으나 강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10년간 학관(學官)으로 머물며 승진하지 못하였다. 그가 지은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와 「수정배시(水精盃詩)」를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보고 기특하게 여겨 당시 실권자 최이(崔怡, ?∼1249)에게 추천하여 대신 문병(文柄)을 잡게 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