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천도교단을 이끌어가던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은 천도교 이념을 표준으로 하는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천도교를 사회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인식하였으며, 그 방법의 하나로 시일학교(侍日學校)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1926년 8월 13일 천도교청년당 본부 임시중앙집행위원회에서 청년 중심의 교회적·시대적 교양 방면을 노력하기 위해 시일학교 설립을 논의하였으며, 9월 20일 「시일학교 통칙」을 발표하였다.
「시일학교 통칙」에 의하면, 시일학교의 목적을 천도 교리의 천명, 천도 교정의 구명, 사회 상식의 보급을 기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천도교청년당에서 지방당부가 있는 곳마다 시일학교를 설립하기로 함에 따라 1926년 9월 19일 경성당부의 경성시일학교와 평양당부의 평양시일학교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1926년 12개, 1927년 114개, 1928년 37개, 1929년 5개, 1930년 1개 등 170여 개의 시일학교가 설립되었다. 함경남도 단천군은 44개, 북청군은 19개의 시일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시일학교는 교장 1인, 간사 2인, 강사 약간 명을 두었으며, 경성시일학교는 교장 나용환, 강사 이돈화·김병제·홍일창·계연집·이두성·김기전·강우·조현우·방정환, 간사 김영환·최덕화 등이 교직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시일학교에는 연구부·장년부·소년부 등 3부를 두었다. 연구부는 시일학교 직원 또는 그에 준하는 교역자로 조직하여 시일학교의 운영 및 교도에 관한 일체의 방략과 이론을 연구하였으며, 장년부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소년부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반 편성을 하였다. 이와 별도로 예비반을 두어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시일학교의 교육과정은 1년이었으며,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남자반,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여자반을 운영하였다. 교과목은 남자반은 한글·교리·상식, 여자반은 한글·산술, 소년부는 한글·동화·가극·음악·무용·산술 등이었다.
시일학교는 일제강점기 식민 동화 교육을 강요하는 시기에 천도교 이념의 사회화를 위해 천도교청년당에서 설립한 비정규 교육기관이었지만, 천도교라는 민족적·민중적 이름 아래 민족 교육과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는 데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