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 개천사(開天寺)의 창건 연혁이나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후기에 광릉후(廣陵侯) 왕면(王沔, ?~ 1218)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면은 승려 현규(玄規)가 개천사의 석탑을 조성하려 하자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에게 조성기의 작성을 의뢰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4에 실린 「개천사청석탑기명(開天寺靑石塔記銘)」에서는, 교류했던 고승이 개천사를 중창할 때 왕면이 보시를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고승의 제자였던 현규는 스승의 사찰 중건을 돕기 위해 푸른 돌로 13층 탑을 조성하였다. 그는 1214년(고종 원년) 탑이 완성되자 비록 승려이지만 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국가의 복을 비는 석탑을 세우게 되었다며 글을 부탁하였다. 이규보는 “부처가 이미 입적했지만 일체가 모두 공이며 적멸은 번뇌를 떠난 깨달음의 경지이다. 부처는 어디서나 화신(化身)으로 나타나니 이 탑도 역시 부처가 머문 곳이다. 탑을 보고 탑을 잊은 뒤에야 보탑이 나오며 그로 인해 여러 부처를 만나볼 수 있다.”는 취지의 기명을 썼다. 또한 권상로(權相老)의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 의하면 1328년(충숙왕 15) 개천사의 잡역을 감면해 주라는 국왕의 전지가 내려졌음을 볼 수 있다. 개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인 15세기에도 확인된다. 1997년 보물로 지정된 「광덕사소장면역사패교지(廣德寺所臧免役賜牌敎旨)」는 1457년 8월에 내려진 세조의 교지이다. 세조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광덕사와 개천사에 들렀고 사찰 승려의 부역을 면해주는 교지를 내린 것이다. 1530년에 완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천안군 불우(佛宇) 조에도 개천사와 광덕사, 만복사(萬福寺), 대학사(大鶴寺)가 모두 화산(華山)에 있음을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1799년 정조의 왕명에 의해 전국 사찰의 위치와 존폐를 조사하여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천안 항목 제일 처음에 개천사가 폐사되었다고 하고 있다. 개천사는 천안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16세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광덕면 보산원(寶山院)에는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개천사가 있었는데, 온양 맹씨가 명당자리에 있는 절을 탐내어 남사당패 놀이에 승려들을 구경 가게 한 다음 절을 불태웠고 절터에 조상의 분묘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에서 개천사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전반 흥덕왕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부계 중심의 종법적 친족 관계가 확산되고 문중, 동족촌(집성촌), 분묘(선산)가 생겨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사찰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