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 있는 고운사(孤雲寺)의 창건 연대나 구체적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기까지 존속하였다. 조선 전기인 1481년(성종 12)에 1차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산현(連山縣) 불우(佛宇)조에는 천호산(天護山)에 고운사와 개태사(開泰寺)가 있다고 나오며 계룡산(鷄龍山)의 불암사(佛菴寺), 상암사(上菴寺), 만운사(萬雲寺)도 언급되어 있다. 이후 1557년(명종 12) 김계휘(金繼輝)가 왕의 외척인 윤원형(尹元衡)의 눈 밖에 나서 관직이 삭탈된 후 이곳으로 내려와 고운사의 전각을 빌려 당호를 정회당(靜會堂)이라 짓고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운사 승려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이후 정회당에서 공부한 유생들이 관찰사에게 승역(僧役)을 면제해 줄 것을 몇 차례 청했다고 한다. 김계휘는 전라도·평안도 관찰사, 형조·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아들은 예학으로 유명한 김장생(金長生)이다. 김장생은 이이(李珥)의 제자이자 송시열(宋時烈)의 스승으로서 서인 학맥의 정통을 이었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은 효종으로부터 이 절터를 하사받았고, 이에 고운사는 1656년 인근의 대둔산(大芚山) 으로 이전하였다. 18세기 말에 나온 『범우고(梵宇攷)』에서도 천호산 고운사가 효종대에 자리를 옮겨 신고운사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벌곡면 수락리에 있던 이 신고운사는 일제강점기 때도 31본산 가운데 하나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존속하였지만,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17세기 중반 사찰을 옮기기 전의 고운사는 같은 벌곡면 양산리에 있었다. 현재 김집의 묘 옆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