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李載虎)는 1964년 전라남도 광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송원고등학교를 거쳐 1983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재호는 1986년 3월 18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반전반핵투위)를 발족하고 투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3월 18일이란 날짜는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으며, 반전반핵투위는 1985년 서울미문화원 점거 농성 이후 반미 투쟁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4월 4일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가 결성되었고, 반전반핵투위는 자민투 소속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방 입소 제도는 문무대(文武臺) 입소 교육과 함께 대학생들에게 실시하는 대표적인 군사훈련이었다. 1986년 4월 7일 성균관대학교 85학번 2학년 학생 500여 명이 전방 입소를 거부하고 철야 농성을 전개하였다. 이를 평가하면서 4월 10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실시될 예정인 85학번 2학년의 전방 입소 훈련을 전면 거부하는 투쟁을 결의하였다. 4월 16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와 자민투가 결합하여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전방 입소 훈련을 미제국주의의 용병 교육으로 규정하고 전면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총학생회 측에서는 김세진(金世鎭)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회장이, 자민투 측에서는 이재호 투쟁위원장이 주도적으로 전방 입소 거부 투쟁을 준비하였다. 4월 20일부터 4월 26일까지 전방 입소 거부 관련 유인물을 배포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결의 대회를 개최하였다.
1986년 4월 28일부터 진행할 계획이던 중앙도서관 농성이 4월 26일 학교 당국의 휴관 결정으로 무산되고, 4월 27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건캠퍼스 도서관에서의 농성 계획이 사전 정보를 파악한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4월 27일 저녁 비상 대책 회의에서 신림사거리 연좌 농성을 결정하고 김세진 학생회장과 이재호 투쟁위원장이 건물 옥상에서 연좌 농성을 지휘하기로 결의하였다.
전방 입소 당일인 4월 28일 오전 9시 입소 대상자 400여 명이 신림사거리에서 집회를 열고 전방 입소 결사 반대 구호를 외쳤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건물 옥상에서 구호를 선창하였다. 곧바로 진압 경찰들이 학생들을 구타하며 연행하였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시너를 몸에 끼얹고 시위대에 대한 진압을 중지하라고 경고하였지만, 경찰들이 건물 옥상으로 진입해 연행을 시도하자 “전방 입소 전면 거부, 한반도 미제 핵 기지화 결사 저지”(김세진), “양키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 반대,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이재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은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도부가 몸에 시너를 뿌리고 진압에 저항하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였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기 위한 예상하지 못한 분신이었고, 그만큼 학생운동권과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세진과 이재호의 투쟁은 1980년대 ‘반미자주화투쟁’으로 확산되었다.
1994년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이재호와 김세진을 추모하는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널리 애창되었다. 1988년 4월 28일 ‘김세진 · 이재호열사추모사업회’가 발족하였고, 2004년 김세진 · 이재호기념사업회’로 재발족하여 김세진이재호기억저장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