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화사(天和寺)의 창건에 관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후의 내력에 대해서는 문헌 등의 기록을 통해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천화사의 옛터가 성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고려 때 국왕이 자주 행차했던 중요한 절 중의 하나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예종과 의종이 이 사찰을 방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천화사에서 유람하며 차를 마시다. 동파의 시운을 쓰다(遊天和寺飮茶 用東坡詩韻)」라는 시를 지어 남겼다. 1377년에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에도 천화사가 언급되어 있는데, 공민왕 때 시흥종(始興宗)과 조계종(曹溪宗)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자 왕은 본래 조계종 소속이었던 천화사를 시흥종에 예속시키고, 시흥종 소속의 광암사(光巖寺)를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 이름을 바꿔 조계종에 예속시켰다고 한다. 천화사는 동서 70칸, 남북 80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절이었는데, 근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돌담과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