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지사(摠持寺)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밀교 계통의 사찰이다. 고려 때는 왕이 자주 행차할 만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절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혜통(惠通)의 법맥을 이은 후예들이 총지암(摠持嵒) 등에 모여서 밀교를 크게 드날렸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의 총지암은 총지사로 추정된다. 이를 토대로 『한국사찰전서』에서는 신라 신문왕-효소왕 때인 7세기 말에 창건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현재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총지동(摠持洞)에 절터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장단군(長湍郡) 탄현(炭峴) 문밖 10리에 있다”고 하였고,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서는 “동서 약 30칸, 남북 약 40칸으로 돌 담장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본말사 제도 시기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다. 『전등사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총지사지(摠地寺誌)」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926년에 주지 염영운(廉英雲)이 절을 중수하고 1928년에 탱화불사를 봉행하였다. 사유재산으로는 밭 1,650평, 사사지(社寺地) 30평이 있었고, 건물로는 법당과 약사전, 요사가 있었다. 아울러 석제 약사여래좌상, 목제 관음좌상, 석제 지장좌상의 불상 3구와 후불탱・신중탱・산신탱・42수관음탱의 불화 4폭이 있었다고 한다. 「총지사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총지사 덕혜(德惠)대사의 누이 송 씨가 절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대사는 정열(貞烈)을 잘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송 씨의 남편 고준실(高俊實)이 장사를 다니는데, 의주에서 박춘건(朴春建)의 집에 유숙하다 재물을 탐낸 주인 박 씨에게 죽임을 당해 말과 함께 압록강에 수장되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수소문해 의주로 간 송 씨는 박 씨 집에서 남편의 유물을 발견하고는 의주 부윤에게 고했으나 이미 뇌물을 받아서 들어주지 않았다. 송 씨가 강변에서 통곡하니 남편의 시신과 말이 강물에서 솟아올랐다. 이 증거를 가지고 다시 부윤을 찾았으나 쫓겨났는데, 갑자기 파랑새가 송 씨 머리 위에서 부윤을 향해 슬피 울었다. 부윤은 비상한 일임을 직감하고 이웃 용천 군수에게 처결을 부탁하고 자리를 비웠다. 용천 군수는 증거가 분명한지라 박 씨를 잡아다가 결국 자백을 받았다. 송 씨는 자신의 손으로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여 칼로 박 씨를 죽이고는 배를 갈라 간을 꺼내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그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은 불교적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데, 절 동네 이야기로서 전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이름으로 보아 밀교인 총지종(摠持宗) 소속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숙종 6년(1101) 9월 26일에 왕이 총지사에 가서 아우인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를 문병했다”고 하였다. 대각국사는 이해 10월 3일에 국사에 책봉되고, 10월 5일에 입적하였다. 국왕의 지극한 돌봄을 받던 대각국사가 총지사에서 병 치료를 한 것은, 이 사찰이 밀교적 행법(行法)으로 이를 해결하는 역량이 있었던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는 “1186년(명종 16) 9월 18일에 진성(鎭星, 토성)이 세성(歲星, 목성)을 범하자 내란(內亂)이 있을까 두려우니 광암사(光嵒寺)와 총지사에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을 열고 명인전(明仁殿)에서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여 이를 물리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는 총지사가 자연재해나 국가적인 변란에 대처하는 기도 도량이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