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찰은 내장산의 서래봉 중봉 330m 고지에 있었는데 원래는 내장사(內藏寺)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을 백련암(白蓮菴)이라 하였고 다시 벽련암(碧蓮菴)이라 칭했다. 그 후 현재의 내장사와 구분하기 위해 정읍군수 김창한(金彰漢)이 ‘고내장(古內藏)’이란 편액을 걸고 이 일대를 고내장이라 불렀다. 고내장은 내장산 제일경(第一景)으로 일컫는 명소로 오봉(鰲峯) 김제민(金齊閔)이 춘경(春景)을 읊은 천불전(千佛殿)의 위치가 이곳 고내장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백련사 혹은 내장사라고 하는 절이 내장산에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내장사라고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39년(중종 34) 나라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으로 사찰 철폐령을 내려 주변의 영은사(靈隱寺)와 함께 불에 탔으나 뒤에 중창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벽련암(壁蓮菴)’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1925년에는 계종(啓宗)이 내장사를 이 절로 옮겨와 한때 내장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계종은 이때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수하고 절 이름을 벽련사(壁蓮寺)라고 하였다. 1925년 내장사에서 선원(禪院)을 결성하여 반농반선(半農半禪) 운동을 펼친 학명선사(鶴鳴禪師)가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인 1951년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1938년 혜순(慧順)이 내장사를 중창하면서 내장사와는 구별되는 벽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극락보전과 삼성각 · 선당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내 서쪽 편에 탑 형태의 부도가 전한다. 서편에는 연대 미상의 석종 부도 1좌가 있으며 뒤편의 암벽에는 전북 태인 지역 출신 여류 서예가 몽련당(夢蓮堂) 김진민(金鎭珉)의 글씨 ‘석란정(石蘭亭)’이 있다. 옛 절터는 1985년 8월 16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벽련암 석축대를 쌓을 때 희묵대사가 서래봉 정상에서 돌을 던지면 수제자 희천이 이를 받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내장산 제일경으로 일컫는 명소에 위치하며 내장사와 역사를 함께 한 절로 호남의 불교문화 이해에 있어 중요한 사찰이다. 한편 백제 때인 660년(의자왕 20) 환해(幻海)가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를 고증할 만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