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업사(奉業寺)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9세기 중반인 854년경에는 화차사(華次寺)라 불렸다. 신라 말 죽주 출신 호족 기훤과 궁예의 후원을 받았던 듯하며, 후삼국의 혼란기에 사역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능달명(能達銘) 기와의 명문에 의하면 청주 출신 호족 능달이 태조 왕건의 명을 받아 죽주 호족세력의 지원으로 청주 출신 장인을 동원해 절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고려 초에는 사세가 확장되어 죽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봉업사를 대규모로 중창해 태조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삼았는데 당시 경기 지역 최대의 사찰이었다. 봉업사라는 명칭은 이때 붙여진 듯하다. 고려 전기인 경종·성종·문종대 불사를 한 흔적을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공민왕이 이 절의 진전에 참배하는 등 고려말까지 사세가 이어졌으나 조선초 숭유억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말 고려초에 조성된 석불입상은 칠장사로 이전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당간 지주와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 3층 석탑과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1989년 지정), 반자 2개, 향완 등이 있다. 1217년(고종 4) 명문이 있는 반자 1개는 연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향완에는 ‘1081년 봉업사’라는 기록이 있다. 이 사찰 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목탑 터 등 건물터 28곳, 통일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막새기와 220여 점, 고려 광종대의 독자적인 연호인 ‘준풍(峻豊)’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명문기와 40여 종 500여 점, 청자, 중국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고려시대의 토기들이 다수 발굴됐으며, 9∼10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덧줄무늬 평편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봉업사가 남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고려 태조의 진전사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