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입정리론소초(因明入正理論疏鈔)』는 11세기 북송대 운엄이 『인명입정리론소(因明入正理論疏)』를 풀이한 주석서이다. 운엄의 전기는 미상이며 기주(冀州) 광교원(光敎院)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의천의 『교장총록』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간행하였으며, 지질로 보아 조선의 간경도감에서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교장총록』에 의하면 전체 8권이고,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소』 3권에 대해 풀이한 주석서이다. 현존하는 부분은 『인명입정리론소』의 상권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후반부의 5건과 중권의 1~29건의 내용을 주석한 것이다.
운엄(雲儼)은 북송대 인물로 추정되나 그의 전기는 미상이다. 본서의 권수에는 ‘기주(冀州) 광교원(光敎院) 사문(沙門) 운엄(雲儼) 술(述)’이라 하여 간략한 주석 사원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저술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된 『인명론』의 주석서 가운데 ‘초팔권(鈔八卷) 운엄술(雲儼述)’이 확인된다.
『인명입정리론소초』의 서명은 권수제 ‘인명입정리론소초’, 판미제 ‘인명엄초(因明儼鈔)’와 ‘인명엄초(因明儼抄)’에 의거하였다. 표지 및 장정은 근대 선장으로 개장되었다. 목판본이고 권56의 2권 1책의 개인소장본이 전존한다. 판식은 상하단변, 무계, 1판의 길이는 57.89㎝, 광고 23.8㎝, 행자수 1판 30행, 1행 2223자, 권5 제2038장, 권6 제1~37장이다. 지질은 황색의 두꺼운 닥종이와 15세기 조선의 간경도감의 판본에서 보이는 고정지가 섞여 있어, 간경도감 중수본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1936년 오야 도쿠조[大屋德城]가 『고려속장조조고』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그간 일서로 취급되었다. 소장인으로는 노중천문고(蘆中泉文庫)가 날인되어 있어, 소노베 마사요시[園部昌良]의 구장서임을 알 수 있다.
『인명입정리론소초』는 송대 운엄의 편찬으로 상세한 편찬 경위는 미상이다. 의천의 『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고, 판식 등으로 미루어 고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질 등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의 간경도감에서 중수하여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교장총록』에 의하면 전체 8권이었고,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소』(이하, 『인명대소』) 3권에 대해 풀이한 주석서이다. 현존하는 부분은 『인명대소』의 상권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후반부의 5건과 중권의 1~29건의 내용을 주석한 것이다.
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권5는 규기의 『인명대소』 3권의 권상에 대한 주석이고, 권6은 『인명대소』 권중에 대한 주석이다. 권5에서 다루고 있는 『인명대소』의 내용은 무소립, 이품, 이체 이류 등의 설명에서 무상병(無常甁), 구모(龜毛) 등을 예시로 하였다. 이어 ‘유’의 2종과 동법(同法)의 동품결정유성, 인의 삼상(三相), 종(宗)과 능립(能立)에 대해서 『이문론』에 의거하여 삼지작법 등을 진나(陳那)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풀이하였다.
권6에서는 성(聲)과 현량상위, 병(甁)과 비량상위, 승론사(勝論師)의 성(聲)과 자교상위(自敎相違), 회토(懷兎), 나패(螺貝)와 세간상위(世間相違), 석녀(石女)와 자어상위(自語相違)에 대한 풀이가 있다. 그중 세간상위의 부분에서 비량의 결정 상위를 설명하면서 신라 순경, 당의 현장과 규기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소립, 능립, 구구(九句), 팔능위(八能立)의 설명에서 문궤 등의 입장을 제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삼장대사의 행적 중 자은에게 삼장, 조론, 입량(立量), 인유(因由)를 전하여 인명학의 체계가 갖추어졌음을 서술하였다.
본서는 다양한 주석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인명으로는 『집량론(集量論)』을 저술한 진나(陳那), 규기, 현장, 문궤(文軌) 등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문헌은 약 20여 종의 인용이 확인되는데 진나의 『인명정리문론』, 규기의 『소』, 『유식소』, 『소요간』 등이 다수 확인되고, 기타 『법원주림』, 『서역기』 등도 확인된다.
본서는 권5의 전반부와 권6의 후반부가 결락된 영본으로, 신라 이후 한국에서 찬술되거나 간행되었던 『인명론』과 관련된 저술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분야 연구의 중요한 연구 자료에 해당한다. 특히, 규기의 『인명대소』에 언급되었던 신라 순경법사가 ‘결정상위의 비량’을 당에 전달했다는 기록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 신라와 당의 교학이나 교류사와도 관련이 깊다. 본서는 현장과 규기의 입장에서 주석하였지만, 이러한 인명학의 문헌이 북송에서 간행되어 고려에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불교 인명논리학의 전개사를 살펴볼 수 있다.
본서에는 신라의 순경법사가 다수 언급되었고, 신라 또는 해동이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인명론』은 현장이 진나의 『인명정리문론』과 상갈라주의 『인명입정리론』을 한역하면서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에 소개되었고, 이후 규기를 비롯한 다수가 특히 『인명입정리론』에 대해 주석하였다. 본서는 송대 『인명론』의 주석이 이루어졌고 신라 순경 등의 인용이 확인되는 점, 한편으로는 고려에 수용되어 활용되는 한편 현전하는 국내외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불교문헌학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