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암(仰巖)은 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 일대 남한강변에 위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수조처(收租處)'로서 충청도의 충주와 단양, 청풍 등 충청도 7개 고을의 조세곡(租稅穀)을 수납하여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조창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앙암의 조창 기능은 1465년(세종 11)에 설치된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흡수되어 폐지되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조운과 조창은 큰 타격을 입었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지방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서 여말선초의 시기부터 조운과 조창이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조세 수납을 하는 곳으로서 조창과 함께 '수조처'라는 곳을 기록하고 있다.
조창과 수조처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상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 곳이므로, 수조처 역시 조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충청도 지역의 경우, 조창은 1곳도 기록하지 않고 수조처만 8곳을 기록하고 있다. 8곳 중 3곳은 아산만 지역에 위치하고, 앙암 등 5곳은 남한강 수계(水系)에 위치하였다. 앙암의 조창은 충주와 단양, 청풍, 괴산, 연풍, 제천, 영춘 등 충청도 7개 고을의 조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충주 등 7개 고을의 조세곡은 앙암 이외에도 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위치했던 금천창(金遷倉)에서도 수납하였다. 당시 7개 고을의 조세곡은 앙암과 금천(金遷) 두 곳으로 나누어 수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앙암이 충주 관아 서쪽 60리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앙암의 현 위치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 남한강변으로 비정된다.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앙암면(仰巖面)이 있었다. 현 앙성면은 조선 후기 앙암면과 복성동면(福城洞面)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행정 단위이다.
앙암의 조창 기능이 정확히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65년(세조 11)에 앙암과 멀지 않은 곳에 가흥창이 설치되었다. 앙암의 조창 기능은 가흥창 설치 시기 즈음에 폐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근의 소규모 조창인 이포창(梨浦倉)과 우만창(宇萬倉)의 기능이 1470년(성종 1)에 가흥창에 흡수될 때 앙암은 언급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전에 이미 앙암의 조창 기능은 가흥창에 흡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앙암은 포구로서의 기능만을 유지하였다. 현재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에는 남한강대교가 세워져 있어, 남한강 반대편의 강원도 원주시 법천리와 도로로 연결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운영된 앙암의 조창은 충청도 충주 등 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 조창이었다. 앙암의 조창은 남한강 수계의 대표 조창인 충주 금천의 덕흥창(德興倉)과 경원창(慶源倉)의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조창 업무를 감독할 임시 관원의 왕래 등으로 인하여 여러 번거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1465년 충주에 가흥창이 새로이 설치되자, 가흥창 설치 시기 즈음에 앙암의 조창 기능은 가흥창에 흡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15세기 중반과 후반에 이르면,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었던 앙암과 같은 소규모 수조처는 폐지되거나, 아니면 많은 고을의 조세곡을 수납하는 조창으로 발전하는 두 가지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