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영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재미민주한인협회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이다. 1909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으며,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자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주미위원부 협찬회 등에서 활동하며 일본 패망 이후 조국에서 활동할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광복 후에는 미국에서 재미민주한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월부터 1926년 봄까지 황해도 재령에 있던 기독교계 학교인 명신학교(明新學校)에 다녔다. 192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평양기독청년회관 도서관에서 일하며 식민지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숭실전문학교 교장 조지 맥큔[George S. McCune]의 주선으로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0년 9월경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으며, 펜실베니아주 이스톤 소재 라파엣대학[Lafayette College]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다. 이후 버크넬대학[Bucknell University]과 뉴욕신학교를 거쳐 1941년 프린스턴대학교 정치과에 들어갔다. 1943년 정치학 석사, 1946년 박사를 취득하였다.
1930~1940년대 뉴욕 한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1937년 9월부터 뉴욕에서 중국후원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 회원들로 구성된 중국후원회에서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대한원조, 일화배척, 중국의 대일전쟁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기만적 행위를 알리기 위해 영문 선전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
1942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다. 1944년부터는 이승만의 주도로 조직된 주미위원부 협찬회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임창영은 1944년 10월 한인교육재단을 만드는 한편, 한미교육재단 서기의 직함을 가지고 전후 전문 인력 양성안을 기획하였다. 일본 패망 이후 수립될 자주독립 정부에서 역할할 인재의 양성을 추진한 것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과 미주 한인 1.5~2세대들을 미국 대학에서 교육하고자 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장면 정부에 의해 유엔 주재 한국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사임하였다. 이후 뉴욕주립대학교 뉴 팔츠(New Paltz) 캠퍼스에서 정치학 교수로 1978년까지 재직하였다.
1972년부터는 신문 『국민의 소리』를 다년간 발간하며 반독재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74년부터 재미구국향군 최고고문직을 맡았으며, 1975년부터 재미민주한인협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77년 결성된 미주민주국민연합 의장,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 수석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1년부터 한겨레운동 미주연합 상임고문을 맡았고, 1995년부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6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