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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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강명규 (姜明奎)
강명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을 지내고 1920년대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거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항일 무력 항쟁에 나섰으며, 8·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육군 장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총 3장과 부칙으로 구성되었으며, 반민족 행위의 범주,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조사 방법 및 절차,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재판절차, 공소시효를 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8월 31일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모두 68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이 제정, 공포되어 폐지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反民族行爲處罰法)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총 3장과 부칙으로 구성되었으며, 반민족 행위의 범주,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조사 방법 및 절차,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재판절차, 공소시효를 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8월 31일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모두 68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이 제정, 공포되어 폐지되었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이익흥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16특사로 석방된 경찰·군인·정치인이다. 190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이다. 일본 큐슈제국대학교, 도쿄대학교 대학원 등을 다녔다. 일제 하에서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경기도 경찰청장, 서울시 경찰국장,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199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방위포장, 충무무공훈장, 청조소성훈장, 동엽 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이익흥 (李益興)
이익흥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16특사로 석방된 경찰·군인·정치인이다. 190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이다. 일본 큐슈제국대학교, 도쿄대학교 대학원 등을 다녔다. 일제 하에서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경기도 경찰청장, 서울시 경찰국장,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199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방위포장, 충무무공훈장, 청조소성훈장, 동엽 자유훈장 등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정진근 (鄭鎭瑾)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송필만 (宋必滿)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