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반민특위"
검색결과 총 11건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
김상덕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청년단 대표, 임시정부 학무부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1917년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1919년에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창립경과급기약사」를 기술하였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김상덕 (金尙德)
김상덕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청년단 대표, 임시정부 학무부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1917년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1919년에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창립경과급기약사」를 기술하였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병길은 일제강점기 강원임업주식회사 취체역, 조선생명징병보험 주식회사 취체역 등을 역임한 경제인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이다. 이완용의 손자로 후작 작위를 이어받았다.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 및 촉탁과 동요회 발기인 겸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와 동아합동목재 주식회사와 강원약업 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12월에 사망했다.
이병길 (李丙吉)
이병길은 일제강점기 강원임업주식회사 취체역, 조선생명징병보험 주식회사 취체역 등을 역임한 경제인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이다. 이완용의 손자로 후작 작위를 이어받았다.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 및 촉탁과 동요회 발기인 겸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와 동아합동목재 주식회사와 강원약업 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12월에 사망했다.
이종성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변호사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법원 검사총장, 법원국장, 반민특위 검찰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건을 맡아 항일민족변호사로 활동했다. 1923년 11월 ‘신천지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박제호, 유병기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1932년 배동건 외 275명이 기소된 ‘간도공산당 사건’을 맡아 변론했다. 1946년 2월 대법원 검사총장으로 선임되었다가 5월에 법원국장으로 전임되었다. 1948년 12월 반민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검찰관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이종성 (李宗聖)
이종성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변호사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법원 검사총장, 법원국장, 반민특위 검찰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건을 맡아 항일민족변호사로 활동했다. 1923년 11월 ‘신천지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박제호, 유병기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1932년 배동건 외 275명이 기소된 ‘간도공산당 사건’을 맡아 변론했다. 1946년 2월 대법원 검사총장으로 선임되었다가 5월에 법원국장으로 전임되었다. 1948년 12월 반민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검찰관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농민운동가.
서정희 (徐廷禧)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 제헌국회 국회법제정 기초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농민운동가.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변영만 (卞榮晩)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장직상은 일제강점기 경일은행, 동아인촌주식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인이며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3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 하양군수, 선산군수 등을 지내다가 1916년에 기업인이 되어 경일은행 등을 설립했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였는데 다섯 차례 연임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이 관리하는 남선전기회사의 사장, 대한생명보험회사 취체역 회장 등을 맡았다.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1959년에 사망했다.
장직상 (張稷相)
장직상은 일제강점기 경일은행, 동아인촌주식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인이며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3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 하양군수, 선산군수 등을 지내다가 1916년에 기업인이 되어 경일은행 등을 설립했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였는데 다섯 차례 연임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이 관리하는 남선전기회사의 사장, 대한생명보험회사 취체역 회장 등을 맡았다.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1959년에 사망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재판관, 제3·4·5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정준 (鄭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재판관, 제3·4·5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김웅진 (金雄鎭)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기룡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사, 국민대표회의 등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재건된 대한적십자사, 시사책진회 등에 참여하였다.
이기룡 (李起龍)
이기룡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사, 국민대표회의 등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재건된 대한적십자사, 시사책진회 등에 참여하였다.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광산업자이자 친일 기업인이다. 1920년대,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군(현, 구성시)에서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여 삼성 금광을 열고 광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광산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광구를 보유하였다. 이것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미쓰이〔三井〕 광산, 일본 광업 등에 매각하여 큰 부를 일구었다. 조선의 금광왕, 광산왕, 천만장자는 그를 일컫는 수식어였다. 그의 성공 배경에는 친일의 그림자도 드러워져 있다.
최창학 (崔昌學)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광산업자이자 친일 기업인이다. 1920년대,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군(현, 구성시)에서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여 삼성 금광을 열고 광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광산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광구를 보유하였다. 이것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미쓰이〔三井〕 광산, 일본 광업 등에 매각하여 큰 부를 일구었다. 조선의 금광왕, 광산왕, 천만장자는 그를 일컫는 수식어였다. 그의 성공 배경에는 친일의 그림자도 드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