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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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
황산벌전투 (黃山伐戰鬪)
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
의자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며 무왕의 맏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구려 공략에 실패한 당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분전했으나 대패하고 항복 후 왕자·대신·장병·백성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가 며칠 뒤 사망했다.
의자왕 (義慈王)
의자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며 무왕의 맏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구려 공략에 실패한 당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분전했으나 대패하고 항복 후 왕자·대신·장병·백성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가 며칠 뒤 사망했다.
「양직공도」는 중국 양나라 원제 재위 연간 소역이 백제사신의 행차를 그린 문서이다. ‘백제사신도’라고도 한다. 526년∼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 제이전의 서술과 부합한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그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양직공도 (梁職貢圖)
「양직공도」는 중국 양나라 원제 재위 연간 소역이 백제사신의 행차를 그린 문서이다. ‘백제사신도’라고도 한다. 526년∼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림에 따르는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 제이전의 서술과 부합한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그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벽돌무덤 (甓돌무덤)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 토성.
서울 몽촌토성 (서울 夢村土城)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 토성.
백제토기는 백제의 영역 안에서 제작, 사용된 토기이다. 중국 타날문토기와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제작기술 측면에서 적갈색연질토기, 회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로 구분된다. 주로 승문(繩文)과 격자문(格子文)이 타날수법(打捺手法)으로 시문되어 있다. 일상생활용기, 제사용기, 부장용기 등으로 분류되는데, 일상생활용기가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부장용기는 옹관주이나 장골용기(藏骨容器)로 쓰인 화장용기(火葬容器) 등이 있다. 주변 인접국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토기로 성장, 발전하였다.
백제토기 (百濟土器)
백제토기는 백제의 영역 안에서 제작, 사용된 토기이다. 중국 타날문토기와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제작기술 측면에서 적갈색연질토기, 회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로 구분된다. 주로 승문(繩文)과 격자문(格子文)이 타날수법(打捺手法)으로 시문되어 있다. 일상생활용기, 제사용기, 부장용기 등으로 분류되는데, 일상생활용기가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부장용기는 옹관주이나 장골용기(藏骨容器)로 쓰인 화장용기(火葬容器) 등이 있다. 주변 인접국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토기로 성장, 발전하였다.
위례성은 한강 남쪽에 있었던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이다.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서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례’라는 명칭은 우리 · 울타리, 아리수 · 욱리하, 어라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의미는 대체로 ‘큰 성’으로 보고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 즉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위례성의 명칭은 4세기 중 · 후반부터 한성으로 변화하였다.
위례성 (慰禮城)
위례성은 한강 남쪽에 있었던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이다.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서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례’라는 명칭은 우리 · 울타리, 아리수 · 욱리하, 어라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의미는 대체로 ‘큰 성’으로 보고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 즉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위례성의 명칭은 4세기 중 · 후반부터 한성으로 변화하였다.
백제 고분은 고구려나 신라·가야와 달리 고유한 특성을 갖춘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백제의 무덤이다. 백제고분은 특유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널·덧널움무덤, 분구 움무덤, 돌덧널무덤 등이 있고 그 외 돌방무덤과 중국의 벽돌무덤 축조 방식을 도입한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서울석촌동고분군, 천안용원리고분군, 연천문호리고분, 부여능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중앙과 지방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백제의 묘제는 6세기 이후 중앙정치세력의 성장과 함께 모두 굴식 돌방무덤으로 통일된다. 고분의 변화가 백제의 정치·사회상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고분 (百濟 古墳)
백제 고분은 고구려나 신라·가야와 달리 고유한 특성을 갖춘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백제의 무덤이다. 백제고분은 특유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널·덧널움무덤, 분구 움무덤, 돌덧널무덤 등이 있고 그 외 돌방무덤과 중국의 벽돌무덤 축조 방식을 도입한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서울석촌동고분군, 천안용원리고분군, 연천문호리고분, 부여능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중앙과 지방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백제의 묘제는 6세기 이후 중앙정치세력의 성장과 함께 모두 굴식 돌방무덤으로 통일된다. 고분의 변화가 백제의 정치·사회상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온조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대 왕이다.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큰아들 비류(沸流)에 이어 태어난 둘째 아들로 보고 있다. 온조가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운 시기는 서기전 1세기(서기전 18년) 또는 3세기 후반으로 보는 등 견해 차이가 있다. 온조왕 대의 마한 병합 기사는 백제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던 일을 온조왕 연간의 일로 소급해 놓은 것이므로 절대 연대를 믿기 어렵다.
온조왕 (溫祚王)
온조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대 왕이다.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큰아들 비류(沸流)에 이어 태어난 둘째 아들로 보고 있다. 온조가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운 시기는 서기전 1세기(서기전 18년) 또는 3세기 후반으로 보는 등 견해 차이가 있다. 온조왕 대의 마한 병합 기사는 백제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던 일을 온조왕 연간의 일로 소급해 놓은 것이므로 절대 연대를 믿기 어렵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설천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를 관통하는 석굴(石窟) 형태의 문(門). 석굴통문.
나제통문 (羅濟通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설천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를 관통하는 석굴(石窟) 형태의 문(門). 석굴통문.
백제의 건국 시조인 온조왕의 어머니로, 백제의 건국설화 중 비류를 시조로 전하는 설화에만 등장하는 왕족.
소서노 (召西奴)
백제의 건국 시조인 온조왕의 어머니로, 백제의 건국설화 중 비류를 시조로 전하는 설화에만 등장하는 왕족.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서울 石村洞 古墳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4세기 경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경략해 군을 설치하고 지배했다는 설. 백제요서진출설·백제대륙진출설.
백제요서경략 (百濟遼西經略)
4세기 경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경략해 군을 설치하고 지배했다는 설. 백제요서진출설·백제대륙진출설.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돌도끼 등이 출토된 집터. 주거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서울 巖寺洞 遺蹟)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있는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돌도끼 등이 출토된 집터. 주거유적.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장고형무덤. 전방후원분.
해남 방산리 장고봉 고분 (海南 方山里 長鼓峰 古墳)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장고형무덤. 전방후원분.
위덕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4∼598년이다. 한강 하류지역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해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했다. 태자로서 이 전쟁을 적극 주장했기 때문에 즉위 초 패전으로 인한 혼란수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역사서 「백제본기」 편찬 등으로 왕권기반이 강화되었다. 신라·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 위상도 되찾았다.
위덕왕 (威德王)
위덕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4∼598년이다. 한강 하류지역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해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했다. 태자로서 이 전쟁을 적극 주장했기 때문에 즉위 초 패전으로 인한 혼란수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역사서 「백제본기」 편찬 등으로 왕권기반이 강화되었다. 신라·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 위상도 되찾았다.
이연년은 1237년(고종 24) 나주목의 속현인 원율(原栗)·담양(潭陽)에서 저항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원율은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담양 또한 나주목의 속현으로서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이연년의 저항은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몽골의 3차 침입(1235~1239, 고종 22~26)으로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점에서 내륙 지역의 피해와 질고(疾苦)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연년 (李延年)
이연년은 1237년(고종 24) 나주목의 속현인 원율(原栗)·담양(潭陽)에서 저항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원율은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담양 또한 나주목의 속현으로서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이연년의 저항은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몽골의 3차 침입(1235~1239, 고종 22~26)으로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점에서 내륙 지역의 피해와 질고(疾苦)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 백제학자 고흥이 제13대 근초고왕 때 편찬한 역사서.
서기 (書記)
삼국시대 백제학자 고흥이 제13대 근초고왕 때 편찬한 역사서.
고양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천 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끌었던 역사적 현장으로, 당시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긴치마(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겨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7~8세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전중반에 석축 성벽이 축조된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양 행주산성 (高陽 幸州山城)
고양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천 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끌었던 역사적 현장으로, 당시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긴치마(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겨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7~8세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전중반에 석축 성벽이 축조된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무덤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으로 8기가 있다. 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현재는 복원공사를 통해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군집된 돌방무덤이며 6호분의 경우 쌍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백제고분으로 알려졌으나 신라토기가 출토되어 신라고분설이 나오면서 백제고분설과 신라고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시기적으로나 구조적으로 6세기 후반대의 신라 주변 지역의 돌방무덤들과 관련되어 있다.
서울 방이동 고분군 (서울 芳荑洞 古墳群)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무덤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으로 8기가 있다. 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현재는 복원공사를 통해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군집된 돌방무덤이며 6호분의 경우 쌍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백제고분으로 알려졌으나 신라토기가 출토되어 신라고분설이 나오면서 백제고분설과 신라고분설이 대립하고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서울 방이동 고분군은 시기적으로나 구조적으로 6세기 후반대의 신라 주변 지역의 돌방무덤들과 관련되어 있다.